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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Jan 06. 2024

길고 어둡기만 한 터널도 끝이 있어요

터널 시야의 위험성과 탈출 방법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많은 터널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어요. 그중에서는 걸어서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는 짧은 터널도 있지만,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에서도 길게 느껴지는 터널도 있지요. 기나긴 터널을 지나야 할 때처럼 시야가 좁아진 상태가 계속되면 언제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싶고 조금은 답답할 수 있어요. 좁은 곳에 있는 것이 두려운 폐소공포증을 겪는 사람부터 평소에는 잘 지내던 사람들까지 모두 겪을 수 있는 일이에요.



   우리는 왜 시야가 좁아지면 답답함을 느끼게 될까요? 우리는 보는 것에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눈은 먼 거리에 위치한 대상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대상이 위험하다면 대처를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해요. 그래서 우리는 시야가 좁아졌을 때 자신이 혹시나 위험 요소를 늦게 발견하거나 놓치지 않을까 불안해져요. 위험을 일찍 발견하지 못하면 유연하게 대처하기가 어렵고, 유연하지 못한 대처는 위험을 더 키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불안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감정이에요. 


  위험이 다가왔을 때 유연한 대처를 하기 어려운 것은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에요. 원시시대의 선조들은 위험한 동물이 다가오면 늦지 않게 빠른 대처를 해야만 했어요.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투쟁 혹은 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에요. 이 반응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빠르고 본능적인 대처를 할 수 있도록 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요.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심박수와 혈압이 올라가면서 정신을 평소보다 과도한 수준으로 일깨우죠. 이 상태는 우리가 불안을 겪을 때의 신체적 변화와 비슷해요. 그래서 각성되고 불안한 상태로 위험과 투쟁할지, 도피할지를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고, 이 반응이 잘 되는 사람이 과거에는 생존에 유리했어요. 바꿔 말하면 위협을 겪을 때 불안할 줄 알았던 선조들이 잘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생존한 선조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투쟁 혹은 도피 반응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요.


  이렇듯 투쟁 혹은 도피 반응에서 오는 본능적인 결정은 과거에서 생존에 유리한 부분이 분명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과거보다 사회가 많이 복잡해졌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도 복잡해졌어요. 우리가 사회에서 만난 위협적인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선조들처럼 우리들도 몸으로 싸우거나 아예 자리를 피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본능적이고 극단적인 선택들을 반복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될 위험이 무척이나 커요. 그래서 불안할 때 내린 본능적인 결정보다 차분할 때 내린 유연한 결정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요. 위험한 상황이 다가오기 전에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갖는 게 생존에 중요해졌어요. 즉, 시야가 넓어서 덜 불안할 수 있는 사람이 생존에 보다 유리해졌어요. 그래서 선조들과 이유는 다를 수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들도 시야가 좁아지면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문제가 없는데도 터널처럼 시야가 좁아져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경우 정신의학에서는 터널 시야(tunnel vision)의 문제가 있다고 해요. 이 사람들은 시야가 좁기 때문에 세상 전부를 바라볼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우울한 사람은 주변에 좋은 일이 있더라도 고통스러운 일만 보여요. 그래서 행복함을 느끼기가 힘든 경우가 많아요. 고통스러운 일을 처리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일에 초점이 맞춰져있어요. 고통스러운 일에서 고개를 돌려 좋은 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의 우울함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긴 터널 속을 지나가는 이들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터널 밖의 밝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에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밝은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해요. 자신에게 왜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인지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질책해요. 그러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실제로 생존이 위협받는 일이 생기기도 해요.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우울함의 터널을 지나가게 되었고, 우울함의 터널을 지나가기 때문에 자책하게 됐고, 자책하게 됐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져요. 이렇게 시작된 악순환의 고리가 견고해지면 생존에 위협을 느끼게 되지만, 이 고리는 끊어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아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날카로운 자책이 아니라 부드러운 자기 성찰이 필요해요. 자책은 과거를 질타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자기 성찰은 힘들었던 과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가 될 수 있게 도움을 줘요.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할 때가 있어요. 터널을 걷고 있더라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중인 거고, 어떻게든 해내고 있는 거예요.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끝이 지금 보이지 않더라도, 이 길은 분명 끝이 있는 터널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만 느껴지더라도,
이곳이 터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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