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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꽤다움 Mar 10. 2024

미루지만 않아도 인생 살맛 더 좋을 텐데요

09. 미루는 일

https://youtu.be/2GKYPOSpy8o?si=e6dkumYnD_WHxUoY

뒹굴뒹굴 - 선우정아


요즘 들어 SNS에 ‘미루는 것’에 대한 심도 있게 고찰하는 게시물들이 많이 보인다. 유퀴즈에 20년간 ‘꾸물거림’을 연구하신 이동귀 교수님의 출연 여파인지, 요즘 현대인들이 두루두루 공유하는 가장 큰 관심사라 그런지, 혹은 그간 내 미루는 습관을 참다 못한 알고리즘이 진절머리가 나 나를 올바른 길로 인하고자 한 건지. 여하튼,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글귀 하나를 소개하며 이번 글을 열어볼까 한다.


미루는 사람의 인생은 언제나 잔잔하게 불행하다. 극단적인 미루기에 의지함으로써, 당신은 나중의 안락함보다 지금의 안락함을 선택한다. 지금 놀고 나중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없어지지만, 끝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부담감을 내내 지고 다녀야 한다. 이 부담감은 당신의 자존감, 자신감, 자기효능감을 옭아 매는 무거운 족쇄가 되어 당신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힘든 일을 먼저 하라>, 스콧 앨런


아아, 정말 그 통찰이 너무나 날카로운 나머지 뼈를 맞은 것을 넘어 찔린 기분이다.


나는 왜 미룰까? 월요일에 매주 연재해야 하는 이 글조차 연재 요일을 바꾸는, 지극히 불성실하면서도 번거로운 작업을 행하면서까지 미루며 일주일동안 고민해봤다. 그래, 나는 대체 왜 일을 미룰까? 그렇게 찾아낸 이유는 무려 네 가지나 된다. 매번 네 개의 이유들이 동시에 발현되는 것은 아니고, 번갈아가면서-체계적으로-작용하는 듯 하다.


일단 첫 번째, 지금 당장의 정신 및 신체 상태보다는 훗날의 그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지금 내 몸과 마음은 이 거대한 작업을 해내기엔 한없이 가냘프고 위태로우니, 감히 내일의, 혹은 언젠가 찾아올 나의 다음의 몸과 마음에 기대보는 것이다. 한결 단단하고 똑부러지는 내가 기다리고 있을 그때 말이다.


두 번째, 닥치지 않은 데드라인으로 인한 여유만만함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다. 시간의 유한함은 잊어버리고, 시간의 무한함에 기대는 아주 어리석은 마음가짐이랄까. ‘아직 한 달이나 남았네’의 한 달이 일주일이 되고, 그것이 또 사흘이 되고, 이틀이 되고, 내일이 되는 그 계산법. 그리고 나는 한 달이고, 일주일이고, 사흘이고, 이틀이고, 내일이고, 나발이고 언제든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 아닌 자만적 태도.


세 번째, 당장의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간 미뤄둔 것들이 대한 여파와 더불어, 역시 인생사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는 걸 증명하듯이 중간에 불쑥 튀어나와 쏜살같이 해내야 하는 일들이 투성이다. 그러니 일단 당장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지 않냐면서, 조금만 더 미뤄두자고 스스로를 토닥여본다.


마지막으로, 퓔이 오지 않아서다. Feel 말이다. 당최 내가 지금 이 일을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부족하니, 나로서는 굳이 이 일을 해내는 것에 대한 열정, 더 나아가 퓔이 도무지 차오르지 않는 거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세상이라지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갖춰야 인생을 살 맛이 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물론, 미뤄서 손해를 봤던 순간은 적잖이 있다. 아니, 정말 많다. 금전적인 손해-미루고 미루다 세일 기간이 끝나버린다거나, 환불 기간이 지나 이도저도 못하게 된 상품들이 기억난다-는 물론, 차갑게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도대체가 도저히 마음이 움직이지가 않아서, 도무지 열정이 생기지 않아서 미뤄뒀다가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


게다가 요즘 미루는 일을 또 말해보라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미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미루고 있기에. 예컨대, 옷장 정리(2개월 방치), 스터디 과제(2주 방치), 독일어 단어 외우기(2년 방치), 생활 습관을 다잡고자 루틴 짜는 것을 위한 계획 세우기(3개월 방치), 카카오톡 답장하기(2주 방치),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후보작 다 보기(1주 방치)등이 있다.


갑자기 문득 궁금해졌다. 모든 걸 최대한 미루려고 하는 내게, 절대 미루고 싶지 않은, 혹은 절대 미루지 않는 것이 있었던가? 그게 뭘까? 그 이유는 내가 그를 정말 사랑해서일까? 고민해봐야겠다. 언젠가 찾아내게 된다면 글 말미에 새로 덧붙여두겠다. 무소식이라면, 그저 모든 것을 미루는 인생을 여전히 살아내고 있다고 기억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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