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계단
https://youtu.be/zR043fcuV0Y?si=JNGNFSS9bL8uvG4M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한 할머니가 발을 헛디뎠다. 그렇게 당신은 손잡이 봉을 두손으로 잡은 채 그대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겠지만-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쓰자면-마치 짚라인을 타듯 양손을 머리 위 손잡이 봉에 둔 채 쭉 내려가셨다는 거다.
“잡아! 잡아!” 건너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놀란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급히 따라 내려갔다. 하지만 역시나 뭘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나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중반부 평지 부분에서 멈췄고, 당신의 손을 내려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얘, 너는 할머니를 잡아드려야지 뭘 멀뚱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니? 큰일 날 뻔했잖니.” 그런 할머니 곁으로 다가간 내게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건너편에서 들리던, 계단을 올라오던 그 사람이었다. “빨리 잡으라는 소리 안 들렸니? 할머니 크게 다치셨으면 어떡할 뻔했어?”
놀람, 안도감, 부끄러움, 죄송함. 이 네 개의 감정이 뒤섞여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할머니를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결코 잘 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반에서 키 번호를 5번이나 달까말까 할 정도로 작았던, 한껏 마른 체형의 열세 살 아이가 섣불리 나서지 못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한참 뒤에서 느즈막히 걸어오던 엄마도 놀라 허겁지겁 내려오시고는,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건너편의 사람에게 말했다. 얘가 잡는다고 할머니가 멈추지도 않고, 오히려 애까지 같이 굴러 떨어졌을 거예요. 다 큰 성인도 따라가서 잡기에는 위험했어요. 건너편 그 사람이 무어라 답했다. 그래도 할머니가 저렇게 내려가는데 도와줘야지. 할머니 잘못됐어 봐요, 어떡 할 거야 그럼? 그러자 엄마도 무어라 말했다. 아까부터 애한테 소리만 지르시고, 본인은 왜 가만히 계세요. 더 가까이 계셨잖아요.
아직도 모든 것이 생생한 그 순간의 기억 탓일까, 나는 내려가는 계단이 무섭다. 옆에서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가 발을 헛딛진 않을까, 꽤 오랜 순간 겁내왔다. 앞사람이 넘어지면 내가 어떻게 잡아 줘야 할지, 일일이 신경 쓰며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평소에는 뚜벅뚜벅 잘 내려가는 듯 싶다가도, ‘지금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핑하며 어지럼증이 도지는 것도 그 겁의 일환이라면 그럴 테다.
그래, 어쨌든 내려가는 할머니를 향해 적어도 나는 달리기라도 했다고, 잡아드리지는 못해도 멈추자마자 할머니의 안부를 묻기라도 했다고, 멀뚱히 서서 바라본 건 내가 아니지 않냐고, 1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되뇌어 본다. 그리고 놀란 마음을 채 다잡기도 전에, 계단을 오르락 내리며 나에게 시선을 건넨 무수한 이들의 눈을 온전히 받아내느라 고생한 열세 살의 나에게도 속삭여 본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할머니도 다치지 않으셨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