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죽음
https://youtu.be/1CrT8AJJEPs?si=Ekq_CC539ZFcKEcP
어렸을 때는 죽음이 너무 무서웠다. 물론 여전히 두렵긴 하다. 끝이 없다는 게.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어차피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결국 끝없이 흘러갈거라는 사실이 참 두렵다. 요즘엔 또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죽음으로 인해 뚝 끊겨버린다는 점, 그게 무섭긴 하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읽었던 책 한 구절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내가 포장해 간 노란 호박죽을 먹으며 내게 종교를 하나 가지고 꾸준히 믿어볼 것을 권했다. 그럼 죽는 날이 다가와도 조금은 덜 무섭지 않겠는냐고.> 그래, 말대로 종교를 믿는다면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헤어짐’같은 이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단지 이 이유 하나만으로 종교를 선택하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럽긴 하다.
처음 ‘죽음’의 존재를 실감했던 건 초등학교 4학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다. 다만, 이 이야기는 언젠가 후술할 ‘어둠’에 대한 글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 다음으로 죽음을 본격적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한 건 아마 2012년 지구 종말론이 만연히 퍼지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일이지만, 지구 종말론을 처음 접한건 바로 인터넷 기사에서였다. 거진 속보처럼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을 걸고 있던 그 기사는 참 자세히 적혀있기도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기사를 읽을 때, 부모님은 하필 나를 집에 홀로 두고 외출하셨다. 그길로 가장 친했던 친구 집 번호로 전화를 걸어, 우리 이제 어떡하냐고 꺽꺽 울어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아직 우리는 너무 짧게 살지 않았냐며 꺼이꺼이 온 집안이 떠나가라 울었다. 친구 어머니가 전화를 바꿔 "그만 울고 얼른 여기 집으로 오렴"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요즘은 꽤 드문 일이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끔 종말론이 화두에 오를 때면 이때의 기억으로 피식거리며 웃곤 한다.
얼마 전, 교수님 연구실에 놀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개중에는 ‘불안’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저는 사실 불안이 엄청 많은 사람이에요,라는 내 말에 교수님이 “죽음이 무섭니?”라고 물어보셨다. 모든 불안은 결국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때 나의 궁극적인 불안, 그러니까 그것의 최종 보스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네, 저는 끝이 없는 게 너무 무서워요."
"세상에 끝이 없는 게 어디 있는데?"
"과학자들이 우주는 끝이 없.."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잖아. ‘우주는 끝이 없다’, 내지는 ‘시간은 끝없이 흘러간다’ 이게 사실인지, 아니 애초에 무슨 뜻인지 누가 알고 있냐는 거지. 만약 우주에 끝이 있다면 우주의 바깥 공간은 무엇이고, 우주에 끝이 없다면 ‘공간’에 끝이 없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이거야."
(교수님과의 대화로 한층 머리가 복잡해지긴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불안감은 훌쩍 떠나가기 마련이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지난번 ‘취미’에 대해 썼던 글에 이어 이번에도 요즘 내가 좋아하는 생각 하나를 짧게 남겨볼까 한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죽기 전 하나의 공통된 신호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이다. 죽기 직전의 사람들은 누구나처럼 그것을 처음 받아 봤기에-모두에게 죽음은 한 번뿐이니-그것이 죽음을 알리는 신호인지 통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죽음을 피하지도 못할 뿐더러, 남겨질 사람들에게도 이 신호의 존재를 알릴 수는 없다. 결국,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신이 마지막으로 베푸는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된다.
여튼 이런 주제로 짧은 소설을 써보려 한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것은 항상 내 머릿속을 부유할 테고, 그것이 어쩌다 ‘끝이 없다’는 생각체에 닿아 다시 불안에 끝없이 잠식되지 않으려면, 이렇게라도 발버둥을 쳐봐야 한다. 한없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나 터무니 없는 망상적 접근같은 것들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