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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꽤다움 Feb 05. 2024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무서웠다

05. 준비되지 않은 상태

https://youtu.be/oV-e7WV-7rg?si=gtaXAoElXpwfQYBn

♬ 행운을 빌어줘 - 원필


준비되지 않은 상태, 정확히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이 두렵다.


그래서 놓친 것들이 많다. 참 여러 소중한 기회들을 잃었다. 지금 돌아봐도 아차 싶을만큼 아쉬운 기억들이다. 지금은 내가 너무 부족해, 미리 공부 조금만 해놓고 시작하자, 약간의 준비가 필요해 등등. 갖은 변명들을 대며 정면승부를 피해왔다. 오히려 부족하니까 당장 시작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당장 브런치만 해도 그렇다. ‘땔감이 될만한 글들을 여러 조각 모아둔 다음에 시작해야겠다’며 한참을 미루고나니, 결국 원래 쓰려던 ‘우당탕탕 독일 생존기’는 흐릿해진 기억으로 방치되었다. 모아둔 총알이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이 막연했던 주제로 꾸준히 글 써보겠다 다짐한 게 그런 의미로 나에게는 꽤나 큰 용기를 요했던 일이다.


두려움의 원인을 파헤쳐보니, 뻔하긴 하다. 남들의 시선 때문이다. 유치하게 말하면 ‘혼나기 싫어서’고, 포장해서 말하면 ‘남들에게 나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싫어서’였다. 굳이 남들에게 나에 대한 부족함을 알아차리게 하는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워낙 타인의 말 한 마디에 휘청거렸던 본인이기에, 그들에 의해 스스로를 부정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학창 시절, 내 기억 속의 나는 분명 말하기를 즐겨하고, 잘 하던 아이였는데 언젠가부터 말하기가 내게 큰 벽으로 다가왔다. 이 역시도 타인의 영향이 컸다. 한때는 무척 친했었는데, 그의 말에 내가 반기를 들면 화를 내던 친구가 있었다. 싸움이 싫었던 나는 결국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 생각을 빙빙 돌렸다. 그렇게 친구에게 ‘주관이 없는 애’라는 핀잔을 듣고 나서야 이를 깨닫고 그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여튼, 그즈음부터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특히 대본 없이-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매우 성가신 일이었다. 어쩌다 발표를 맡게 되면 말해야 할 모든 문장들을 적고, 그 문장들을 또 달달 다 외워야 했으니 말이다. 뭐, 지금은 많이 노력한 끝에 여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몇 개의 문장들만 적어놓고도 발표를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스킬이 생겼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말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그들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나라서 스피치 특강, 수업같은 걸 찾아본 적도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나는 또 주저했다. 어떻게 다시 그-말하기에 대한-자신감을 충전했는데, 첫 수업 날 무수한 타인들의 지적으로 그 자신감이 몽땅 사라질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물론 수업은 ‘말하기’를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이지만, 그 끝에 다다를 나보다는 역시 첫 수업 후 다친 마음으로 터덜터덜 돌아올 나라는, 가까운 미래가 더욱 쉽게 상상되는 법이었다.


이처럼 나는 특히 뭔가를 ‘배우는’ 것에서 많이 망설이곤 했다. 부족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 않았다. 참 모순적이다. 부족함을 채우고자 배우는 것인데, 부족함을 어느 정도 채우고 난 뒤 배움을 시작하겠다라니. 그런 의미에서 작년 겨울부터 다니기 시작한 통기타 수업은 크게 거리낄 것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일 년 동안 기타를 배워봤으니. 초급반 정도면 혼나지 않을 자신 정도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어는 안 된다. 일 년을 배웠지만 또 다른 일 년이 지나는 동안 다 까먹어버렸으니까. 그래서 한참을 또 미뤘다. 그렇게 내 달력은 여러 개의 독일어 문화원 개강일들이 표시된 채로 한 장씩 넘겨졌다. 아무튼, 뭐 이런 식이었다.


얼마 전, SNS를 하다 이런 글귀를 봤다.

때론 미친 척하고 딱 20초만 용기를 내 볼 필요도 있어. 진짜 딱 20초만 창피해도 용기를 내는 거야. 그럼 장담하는데 분명 멋진 일이 생길 거야.


거창한 글귀에 비해 다소 소박한 다짐이지만,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신청했다. 독일 생활 이후 거의 매일 생각해왔던 자격증인데 도전할 용기가 부족했다. 필기는 어떻게 친다 해도, 무시무시하기로 소문난 실기가 두려웠다. '나는 요리가 취미인 것도 아니고, 조금씩 깔짝거려본 게 전부인데 이런 내가 통과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해도 되는 걸까?' 그렇지만, 일단 20초의 용기를 내서 신청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한동안 불안에 사로잡혀 잠시 놓고 있던 마인드를 다시 장착시켰다. 그리고 알아차린 지극히 당연한 사실 하나. 누구나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


떨어지면 다시 하면 되는 거고, 또 떨어지면 또다시 하면 되고, 그러다 또 떨어진다면 인생은 삼세판이니 한 번 더 하면 될 테지. 근데 다음에 또 떨어진다? 그러면...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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