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57초 동안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떠올려 본 단상입니다.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음악과 함께 읽어 보세요.소설 속 주인공은 가수의 성별을 따릅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녀석들이 한가득이다. 출석만 잘하고 딱 한번 제출하는 리포트만 잘 써서 내면 학점을 잘 주시기로 유명한 이 교수님 수업엔 성실한 게으름뱅이들이 가득하다. 적어도 강의 내내 졸 지언정 퍼진 몸을 이끌고라도 강의실에 오는 정성만 있다면 이 과목은 낙제를 면할 수 있으니.
전날 해 지기 전부터 모여 기울인 술잔은 캠퍼스 안에서 동트는 모습을 같이 보며 해장술을 하고 나서야 마무리가 되었고 늘 1교시 수업만을 고집하는 이 교수님 수업에는 이미 선배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녀석들 한 무리가 늘 뒷줄을 차지하고 앉아 졸고 있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교재에 적힌 시를 조용히 속으로 읽어본다.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누운 녀석들 만큼은 아니지만 어젯밤 술에 나도 속이 쓰리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을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하늘이 보일 수도 있구나... 물끄러미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몇 점 떠 있고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은 한층 높아져 있고 그 높이를 알 수 없는 푸른 공간이 가슴을 뻥 뚫리게 해 준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정말 가을로 가득 차 있구나...' 잠시 시인이 느낀 시공간에 같이 있는 듯한 착각에 작은 희열을 느낀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밤하늘 속의 별도 아닌 가을 속의 별들이라니... 푸른 하늘에 떠있는 별도 다 헤아릴 마음이었나?
하긴... 파란 하늘에 뜬 별도 별이니...
어느 날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파란 하늘에 홀로 뜬 별이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외로워 보여 한참을 쳐다본 적이 있다. 어두운 하늘에 떠있는 별들은 찬란히 빛나기라도 하는데 밝은 하늘에서 홀로 빛나는 별은 왠지 처연하고 외로워 보였다. 원해서 온 게 아닌 자리에서 말 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정해진 시간까지는 그 자리를 지켜야 했던 어느 날의 나처럼...
나도 모르게 뒤로 꺾인 고개에 정신이 든다. 얼마나 졸고 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몰라 입 주변을 닦고 주변을 둘러본다. 나보다 정신 못 차린 녀석들이 더 많아 안심하고 앞을 본다.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교수님이 칠판에 분필로 판서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칠판에는 '청록파', '1941년', '조선문인협회' 등의 글씨가 적혀 있다. 사각거리는 분필 소리와 함께 '그리움의 미학'이라는 글씨가 적힌다.
"... 앞서서 윤동주 시인의 주요 작품이 1941년에 써졌다는 것을 얘기했었는데, 이 작품 또한 1941년 11월 5일에 쓰인 것으로 시인의 정신적 지향점인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이미지가..."
교재 위에 가만히 따라 써본다.
'그리움의 미학'
쓴 글 밑에 의미 없이 밑줄을 여러 번 긋고 동그라미를 쳐댄다. 신입생 딱지를 겨우 뗀 나는 아직 그렇다 할 연애 한번못해봤다. 이제껏 상대는 눈치채지도 못했을 짝사랑과 손 한번 스쳐본 풋사랑 정도만 겨우 해 본 상황이라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마음 저릿하게 울리는 그 무언가를 아직 느껴보질 못했다. 그리움을 미학으로까지 만든 이 시인의 마음속은 무엇으로 그리도 저릿했을까...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걱정 없이 별을 헤아렸던 시인도 이제 별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네.
쉬이 아침이 온다는 거 보니 밤잠을 설쳐대는 거 아닌가...
오늘 고민한다고 다 해결될 일이 아니니 내일 밤으로 남은 고민을 미룰 수밖에 없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 아닌가...
혼자서 멋대로 시를 해석해본다.
"... 자네들도 몇 년 뒤에 곧 겪게 되겠지만 1941년은 윤동주 시인도 4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며... 시인 또한 자신의 진로를 정해야 했던... 막막했겠지. 부모의 기대와 지원으로 타지에서의 대학생활을 마쳤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을 테니... 일본 유학 또한.... 오랜 시간... 고향으로부터 떠나... 전쟁의 위험..."
시인의 밤에는 별이 바람에 스치는데 나의 아침에는 교수님의 강의가 귀에 스치고 지나간다.
나도 대학만 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다. 아, 새로운 세상이 열렸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혼자 모든 걸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새로운 세상.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대학만 들어가면 내 젊은 청춘도 아름답게 자동으로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풋사랑은 고백도 한번 못한 채 끝이 나 버렸고 내 맘을 설레게 하던 몇몇 소녀들은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 용기 있던 동기 녀석이나 근사한 선배들의 팔짱을 낀 채 지나치는 나와 인사를 나눌 뿐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시인의 가슴속에 새겨지는 별은 추억이며, 사랑이며, 쓸쓸함이다. 누군가를 향한 동경과 그가 평생을 사랑한 시와 언제나 가슴 저릿한 어머니가 담긴다.
나의 별에는 무엇이 담길까...
별 하나에 술잔과,
별 하나에 첫사랑과,
별 하나에 외로움과,
별 하나에...
갑자기 떠오른 얼굴에 내가 더 당황을 해 고개를 휘젓는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인 양 털어버리려는 듯... 이미 호감을 드러내 놓고 표시한 녀석이 여럿 있는 동아리 동기의 싱그러운 얼굴이 별 하나에 떠오르고 말았다. 떠올린 내가 싱겁다고 스스로 핀잔을 하듯 피식 웃으며 다시 시를 읽어 내려간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 시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나열이 된 이 부분은 갑자기 시 형식에서 벗어나 산문 형식을 띄고 있는데... 지상의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계였... 아름다운 말 한마디의 대상들이 모두 시인이 열망하는 지향점... 별처럼 아스라이 멀리... "
멀리 있는 아름다움이라... 별이 아스라이 멀듯 시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멀리 있었구나... 어머니마저...
시인이 쓴 '아름다운 말 한마디'라는 표현이 갑자기 마음에 박힌다. 아름답다는 표현 자체가 갑자기 너무나 생경하게만 느껴진다. 일상 속에서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언제였을까? 어릴 적 친구의 이름 하나도 아름다워 챙겨둔 시인의 마음이 곱다. 아름다운 말 한마디가 거의 대부분 '이름'인걸 보고는 미소가 지어진다. 내 이름도 옆에 적어본다. 불러서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의 이름을 같이 적는다. 나의 아름다운 말들이 적힌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원래 첫 원고에서 시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만, 후배였던 정병욱이 이 시를 읽고 어쩐지 마무리가 좀 허한 느낌이 든다고 말을 했고... 그 말을 듣고 지금의 시의 마지막 부분이 덧붙여... 이 정병욱이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윤동주가 원고를 맡긴...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께 맡긴 그 원고가... 마룻바닥을 뜯고 숨겨 무사할 수...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대표작 대부분이..."
한 귀로는 교수님의 말씀을 흘려들으며 시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 11. 5)
덧붙여진 이 부분을 쓰며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말을 듣고 추가된 이 마지막을 읽으며후배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시인 자신에 대한 예언이며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시를 맡길 수 있는 동료에 대한 헌사였을까...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으로 이 시가 끝이 난 것보다 '이름이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것으로 끝낸 지금의 시가 말 그대로 '허한 느낌'으로 끝나지 않아 더 마음에 든다.
11월 5일이면... 딱 지금의 계절에 쓰였겠구나...
오늘밤엔 나도 별을 한번 헤아려 볼까...
반은 졸고 반은 넋이 나간 학생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진심으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죄송스러운 마음 반, 존경스러운 마음 반으로 허리를 세우고 수업에 집중을 해 본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의 릿교대학과 도시샤 대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가 겪은 시대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가 걸었을 길들을 따라 걸으며 그래도 시인은 하루하루 소소한 행복들을 잊지 않고 지냈겠구나...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도 곱게 책 속에 끼워 말렸던 그의 마음에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쉽사리 내쳐지지 않았... 그 소소한 소중한 것들이 모두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고 그리워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누구보다 슬퍼한... 슬픔의 미학, 그리움의 미학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마음에 들이고 쉽사리 내치지 않았던 시인의 하루는 어땠을까...
소중한 것들이 모두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으면... 그 마음이 주체가 될까...
무언가 대단한 사랑을 하고 난 사람만이 저릿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닐 수도...
그 대상이 무엇이든 깊고 진실하게 마음을 내어 주었다면...
"자네들이 밤새 기울인 술잔이 그 어떤 의미가 있었다면 오늘의 피곤함은 죄가 아니다. 그때 내쉰 한숨에, 그때 흘린 눈물에, 그때 내지른 목소리에 담겼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나이가 들어도 평생 잊지 말기를... 단 한 권의 유고시집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이 시인처럼..."
수업은 끝이 났다. 비어 가는 강의실에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다. 창 밖에 보이는 가을 하늘이 예전의 그것과는 달리 느껴진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고요해진 캠퍼스에 다시 발을 디딘다. 계단을 오르고 불 꺼진 복도를 지나 구석에 박혀있는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낮에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창을 열어 새어 들어오는 달빛과 별빛으로 이 공간의 어둠을 달랜다.
창가에 기대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이 참 많기도 하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별을 헤아려 본다. 유난히 밝은 별들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무른다.
갑자기 듣고 싶은 노래가 하나 떠오른다. 어두운 동아리방을 손으로 더듬어 카세트가 놓인 곳으로 간다. 달빛으로 비춰 겨우 글씨를 읽어 테이프를 찾는다. 낡은 더블 데크 카세트에 A면을 꽂아 넣고 앞으로 빨리 감기를 누른다. 몇 번을 반복해서 그 노래에 맞춘다. 딸깍 소리와 함께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가 흘러나온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1집이 유작이 된 유재하의 모습이 윤동주 시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잠시 나를 스쳐간 모든 인연들을 떠올려본다. 서로의 감정을 재느라, 손해보지 않으려, 상처 받지 않으려 뒤로 물러섰던 내 모습들이 부끄럽다. 시인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떠올려본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해 본 적이 있던가... 보고 싶다고 말해 본 적이 있던가...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지나간 내 어머니의 시절이 슬프다.
밤하늘 별들에 대고 부족한 나를 책망한다. 용기 없던 나를 변명하듯 나와 인연이 닿았던 아름다운 이름들을 노래 속 가사처럼 하나하나 추억하며 내 품에 뜨겁게 안아본다. 오늘은 나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막히는 퇴근길을 운전할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한다. 막힐 줄 알면서도 조금 더 가깝다고 이 길로 들어선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다. 멍하니 기다리는 이 시간이 지루하고 짜증이 난다. 라디오 DJ의 말이 길어져 노래가 나오는 채널을 찾아 버튼을 누른다. 자동차 스피커를 통해 낯익은 그 노래가 낯선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어... 누가 또 불렀네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알 거다. 아무리 다시 불러도 그 가수의 그때 그 감성을 따라갈 수 없음을...
그래도 이 노래로 위로받았던 그 순간만큼 다른 사람들도 한번 더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노래가 울려 퍼질 때 태어나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그때의 감성을 붙잡아 다시 이 노래를 부른다. 여러 가지 버전의 노래가 나올수록 원곡이 가진 감성은 더욱 그리워진다.
창 밖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본다. 그때처럼 별을 헤아려 본다. 별빛은 변함없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다. 나는 변함없지 않다. 그때의 감성은 잊고 산지 오래고 그 시절 전혀 중요치 않다고 여겼던 삶의 허물들에 얽매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나의 오늘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순수한 시절의 마음을 시와 음악으로 남긴 그들은 여전히 그 상태로 머물러 시대가 바뀌어도 지금의 20대의 심장 속에 함께 뛰며 살아 숨 쉬는데 아스라이 멀어져 버린 나의 젊음은 낮에 뜬 별처럼 길을 잃고 외로이 홀로 떠있다가 내게서 조차 잊혔다. 그때의 가슴 뛰던 내가 그리워 마음이 저릿하게 아프다. 노래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원곡을 찾는다.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틀어줘."
건조한 기계음이 대답하며 1초 만에 익숙한 그 반주가 흘러나온다.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리자 가슴 아픈 영화를 본 것 마냥 심장 한 구석이 아파온다. 내뱉는 숨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억지로 다시 삼킨다. 지금도 습관처럼 감정을 억누르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헛웃음이 작은 흐느낌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