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 26초 동안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떠올려본 단상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음악과 함께 읽어보세요.소설 속 주인공은 가수의 성별을 따릅니다.
나른한 태양이 짧게 민 정수리를 덥힌다. 까까머리 녀석들이 우르르 밀려왔다가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지만 타지 않고 보내버린다. 그 아이가 도착할 시간이 거의 되었을 텐데... 다시 버스가 오는 쪽을 보는 척하며 언덕배기를 내려오는 여학생들을 흘깃흘깃 쳐다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고개를 홱 돌리고 가방에서 카세트를 꺼내 엉킨 이어폰 줄을 풀어 귀에 꽂는다. 재잘거리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일부러 관심 없는 듯 도로만 쳐다보다 도착하는 버스에 바로 올라탄다. 늘 그래왔듯 비어있는 맨 뒷자리로 가서 앉는다. 내 뒤로 그 아이도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 타서도 호들갑스럽게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는 그 아이를 못 본 척한다. 버스가 출발한다. 익숙한 덜컹거림에 몸을 맡긴다.
"뭐 들어?"
웬일로 늘 앉는 자리가 아닌 내 옆으로 와 앉은 그 아이가 왼쪽 귀의 이어폰을 허락도 없이 뺀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지만 그 손을 막지는 않는다. 옆에 놓여있던 내 가방을 휙 자기 무릎 위로 가져간다. 가지런히 펼쳐진 그 아이의 교복 치마 위에 내 가방이 놓인다.흔들리는 버스에서 애써 중심을 잡으면서그 아이가 내 가방 지퍼를 열어 카세트를 찾는다.
"야!"
엄한 눈으로 그 아이를 쏘아보지만 가방을 뒤지는 작은 손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할 뿐 내치지는 않는다.
"너 맨날 버스 맨뒤에 앉아서 이어폰만 꽂고 있더라. 나도 들어보자. 너 무슨 음악 듣는지."
실랑이 끝에 한쪽 이어폰과 카세트를 손에 쥔 그 아이는 황당하다는 듯 쏘아보는 나를 외면하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들킬까 봐 의자 뒤로 머리를 기댄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확 멈춘다. 온몸이 앞으로 쏠린다. 반사적으로 그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팔을 손잡이 쪽으로 뻗는다. 내 팔에 기대 겨우 중심을 잡은 그 아이가 당황하며 의자에 다시 앉는다. 못 본 척하고 버스 창문을 조금 연다. 시원한 공기가 반갑다.
다른 교복을 입은 아이들 한 무리가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안이 시끌시끌해진다. 버스 맨 뒷좌석을 맡으려는 아이들 한 무리가 돌진해온다. 무리하게 앉은 아이들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긴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시끌시끌 신난 녀석들이 부러 그 아이 쪽으로 무게를 실어 앉는다. 여차하면 의자에서 일어나겠지 하고 심술을 부리는 거다. 얼굴이 빨갛게 된 그 아이가 끝까지 의자에서 꼿꼿하게 자리를 지킨다. 내 쪽으로 넘어오지 않게 안간힘을 쓰는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실실 웃으면서 밀어대는 녀석들 중 하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내 눈과 마주친 한 녀석이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린다.
"야! 오늘 담탱이 새끼 봤냐? 장난 아니었지?"
그 아이를 향했던 한 무리의 힘은 담임 욕으로 넘어간다. 내 눈에 들어갔던 힘도 버스 창 밖으로 넘어간다. 잔뜩 긴장했던 그 아이의 몸이 이제야 좀 자연스러워진다. 빈 공간이 없어진 버스에는 그만큼의 재잘거림이 채워지고 창 밖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진다. 버스 엔진 소리에 섞인 아이들의 목소리는 경쟁을 하듯 높아지다 버스가 좌회전, 우회전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단체 함성 소리로 바뀐다.
"넌 책은 안 갖고 다녀? 가방 속에 테이프밖에 없네?"
한쪽 눈은 계속 그 아이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지만 애써 관심 없다는 듯 힐끗 한번 쳐다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내 왼쪽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이 그 아이의 오른쪽 귀에 꽂히고 이어폰 줄 하나로 순간 그 아이와 내가 연결이 된다. 그 아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다. 버스 창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음악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버스는 이제 시내를 벗어났다. 흔들리는 버스 창에 비친 그 애의 표정을 살핀다.
"어?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손가락으로 가만히 함께 박자를 맞춘다. 흔들리는 버스와, 해가 지는 풍경과, 내 옆의 그 아이와 함께 듣는 이 음악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40분 넘게 이 버스를 타고 등교 하기 시작했다. 나와 그 아이는 시간이 맞을 때 종종 아침저녁 버스에서 마주쳤다. 집과 학교가 종점에서 종점이라 나는 늘 앉는 자리에 앉아서 텅 빈 버스가 가득 채워지고 다시 텅 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버스 맨 뒤 장의자의 왼쪽 창가는 항상 내 자리였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두정거장 지난 곳에서 버스를 탔고 늘 내가 앉는 자리의 반대편 장의자 바로 앞자리에 앉아 버스 바퀴 쪽에 발을 걸쳐 두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깔끔하게 똑딱 핀까지 꽂아 흐트러짐 없이 찰랑거리는 그 까만 머리를 보는 게 좋았다.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밖은 어둑어둑 해 지고 환한 버스 불빛에 그 아이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어느 날엔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가고, 어느 날엔 창에 기대 졸기도 했는데 뒤에서 몰래 그 모습을 보는 게 내겐 무료한 하루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침저녁으로 그 아이가 나와 같은 버스에 타는지 안 타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 하루 기분은 고작 그런 것에 좌지우지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는 그 아이를 보았다. 기대가 없었던 고등학교 생활에 비밀스러운 활력이 생겼다. 교실을 이동하거나 운동장에 나갈 때 가끔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까르르 웃는 그 아이가 보인다. 늘 그렇듯 못 본 척 지나가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야, 너 나 알지?"
갑자기 훅 들어온 그 아이의 물음에 얼음이 되어버렸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옮겨진 내 시선 쪽으로 머리를 밀고 들어온 그 아이가 내 눈을 보고 한마디 남기며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난 너 알아."
예상치 못한 그 아이의 말에 잠시 가던 길을 잊고 만다.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가다 주춤거리며 잃어버린 목적지를 다시 찾는다. 그런 식이었다. 그 애는.
버스 창밖 풍경과 음악이 나름 잘 어울린다. 말없이 함께 듣고 있는 그 아이가 궁금해 창가에 비친 표정을 살핀다. 한창 듣던 음악이 끝나고 갑자기 "배철수의 음악 캠..."까지 들리더니 다른 노래로 바뀐다.
"아... 라디오 듣다가 녹음한 거라..."
당황한 내가 변명하듯 말한다.
"음악캠프? 별밤은 안 들어?"
"가끔."
다시 또 음악이 흐른다. A면이 끝나고 B면으로 테이프가 넘어간다.
"오토리버스네... 멋진데?"
멋지다는 말이 나한테 한 말인 듯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시끌벅적하던 버스 안에 이제 빈자리가 늘어간다. 풀벌레 소리가 창밖에서 들리는 건지 노랫소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가 흘러나온다. 내려야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쉽다.
곧 그 애가 내릴 정류장이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서 훅 불고는 카세트와 함께 나에게 건네다가 도로 자기 품에 가져간다. 놀란 나를 보며 놀리듯 묻는다.
"나 이 테이프 빌려주면 안 돼?"
"뭐?"
"그냥 해본 말이야.얼긴... 보면 인사나 좀 해. 나 간다."
버스 문이 열리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그 아이가 내린다. 버스 계단을 내려가는 그 아이의 모습이 슬로 모션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쿵쾅거리는 내 심장 박동 소리만 버스에 가득 찬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방을 들고 그 아이를 따라 내린다.
"어? 너 여기 아니잖아."
그 아이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본다.갑자기 할 말을 잃는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어딜 봐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어렵게 그 아이의 신발을 보며 말한다.
"아니... 빌려줄게. 이거..."
카세트에서 테이프를 꺼내 쭈뼛거리며 그 아이에게 내민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활짝 웃는 그 아이의 얼굴이 눈이 부시다. 그 애가 가만히 다가와 테이프를 받아 손에 꼭 쥔다.
"진짜지?"
그 애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웃음을 머금고 쳐다보는 그 아이의 얼굴을 흘깃 보고 고개를 돌린다.온몸이 심장과 함께 뛴다.
"주말 동안 듣고 꼭 돌려줄게. 근데... 이거... 나 녹음해도 돼?"
"어?... 어..."
마음이 벅차오른다.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머리만 긁적이다 머쓱해진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