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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망 Sep 07. 2021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음악단편소설] feat. 가수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https://youtu.be/t8P-zdkoeJA



4분 26초 동안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떠올려 본 단상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음악과 함께  읽보세요. 소설 속 주인공은 가수의 성별을 따릅니다.




 나른한 태양이 짧게 민 정수리를 덥힌다. 까까머리 녀석들이 우르르 밀려왔다가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지만 타지 않고 보내버린다. 그 아이가 도착할 시간이 거의 되었을 텐데... 다시 버스가 오는 쪽을 보는 척하며 언덕배기를 내려오는 여학생들을 흘깃흘깃 쳐다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고개를 홱 돌리고 가방에서 카세트를 꺼내  엉킨 이어폰 줄을 풀어 귀에 꽂는다. 재잘거리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일부러 관심 없는 듯 도로만 쳐다보다 도착하는 버스에 바로 올라탄다. 늘 그래왔듯 비어있는 맨 뒷자리로 가서 앉는다. 내 뒤로 그 아이도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 타서도 호들갑스럽게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는 그 아이를 못 본 척한다. 버스가 출발한다. 익숙한 덜컹거림에 몸을 맡긴다.

  

"뭐 들어?"

웬일로 늘 앉는 자리가 아닌 내 옆으로 와 앉은 그 아이가 왼쪽 귀의 이어폰을 허락도 없이 뺀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지만 그 손을 막지는 않는다. 옆에 놓여있던 내 가방을 휙 자기 무릎 위로 가져간다. 가지런히 펼쳐진 그 아이의 교복 치마 위에 내 가방이 놓인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애써 중심을 잡으면서 그 아이 내 가방 지퍼를 열어 카세트를 찾는다.


"야!"

엄한 눈으로 그 아이를 쏘아보지만 가방을 뒤지는 작은 손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할 뿐 내치지는 않는다.


"맨날 버스 맨뒤에 앉아서 이어폰만 꽂고 있더라.  나도 들어보자. 너 무슨 음악 듣는지."

실랑이 끝에 한쪽 이어폰과 카세트를 손에 쥔 그 아이는 황당하다는 듯 쏘아보는 나를 외면하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들킬까 봐 의자 뒤로 머리를 기댄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멈춘다. 온몸이 앞으로 쏠린다. 반사적으로 그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팔을 손잡이 쪽으로 뻗는다. 내 팔에 기대 겨우 중심을 잡은 그 아이가 당황하며 의자에 다시 앉는다. 못 본 척하고 버스 창문을 조금 연다. 시원한 공기가 반갑다.

 

 다른 교복을 입은 아이들 한 무리가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안이 시끌시끌해진다. 버스 맨 뒷좌석을 맡으려는 아이들 한 무리가 돌진해온다. 무리하게 앉은 아이들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긴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시끌시끌 신난 녀석들이 부러 그 아이 쪽으로 무게를 실어 앉는다. 여차하면 의자에서 일어나겠지 하고 심술을 부리는 거다. 얼굴이 빨갛게 된 그 아이가 끝까지 의자에서 꼿꼿하게 자리를 지킨다. 내 쪽으로 넘어오지 않게 안간힘을 쓰는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실실 웃으면서 밀어대는 녀석들 중 하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내 눈과 마주친 한 녀석이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린다.


"야! 오늘 담탱이 새끼 봤냐? 장난 아니었지?"

그 아이를 향했던 한 무리의 힘은 담임 욕으로 넘어간다. 내 눈에 들어갔던 힘도 버스 창 밖으로 넘어간다. 잔뜩 긴장했던 그 아이의 몸이 이제야 좀 자연스러워진다. 빈 공간이 없어진 버스에는 그만큼의 재잘거림이 채워지고 창 밖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진다. 버스 엔진 소리에 섞인 아이들의 목소리는 경쟁을 하듯 높아지다 버스가 좌회전, 우회전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단체 함성 소리로 바뀐다.


"넌 책은 안 갖고 다녀? 가방 속에 테이프밖에 없네?"

한쪽 눈은 계속 그 아이의 손 닿는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지만 애써 관심 없다는 듯 힐끗 한번 쳐다보고 아무 대답하지 않는다. 내 왼쪽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이 그 아이의 오른쪽 귀에 꽂히고 이어폰 줄 하나로 순간 그 아이와 내가 연결이 된다. 그 아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다. 버스 창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음악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버스는 이제 시내를 벗어났다. 흔들리는 버스 창에 비친 그 애의 표정을 살핀다.

"어?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손가락으로 가만히 함께 박자를 맞춘다. 흔들리는 버스와, 해가 지는 풍경과, 내 옆의 그 아이와 함께 듣는 이 음악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40분 넘게 이 버스를 타고 등교 하기 시작했다. 나와 그 아이는 시간이 맞을 때 종종 아침저녁 버스에서 마주쳤다. 집과 학교가 종점에서 종점이라 나는 늘 앉는 자리에 앉아서 텅 빈 버스가 가득 채워지고 다시 텅 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버스 맨 뒤 장의자의 쪽 창가는 항상 내 자리였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두정거장 지난 곳에서 버스를 탔고 늘 내가 앉는 자리의 반대편 장의자 바로 앞자리에 앉아 버스 바퀴 쪽에 발을 걸쳐 두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깔끔하게 똑딱 핀까지 꽂아 흐트러짐 없이 찰랑거리는 그 까만 머리를 보는 게 좋았다.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밖은 어둑어둑 해 지고 환한 버스 불빛에 그 아이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어느 날엔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가고, 어느 날엔 창에 기대 졸기도 했는데 뒤에서 몰래 그 모습을 보는 게 내겐 무료한 하루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침저녁으로 그 아이가 나와 같은 버스에 타는지 안 타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 하루 기분은 고작 그런 것에 좌지우지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는 그 아이를 보았다. 기대가 없었던 고등학교 생활에 비밀스러운 활력이 생겼다. 교실을 이동하거나 운동장에 나갈 때 가끔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까르르 웃는 그 아이가 보인다. 늘 그렇듯 못 본 척 지나가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야, 너 나 알지?"

갑자기 훅 들어온 그 아이의 물음에 얼음이 되어버렸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옮겨진 내 시선 쪽으로 머리를 밀고 들어온 그 아이가 내 눈을 보고 한마디 남기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난 너 알아."

예상치 못한 그 아이의 말에 잠시 가던 길을 잊고 만다.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가다 주춤거리며 잃어버린 목적지를 다시 찾는다. 그런 식이었다. 그 애는.


 버스 창밖 풍경과 음악이 나름 잘 어울린다. 말없이 함께 듣고 있는 그 아이가 궁금해 창가에 비친 표정을 살핀다. 한창 듣던 음악이 끝나고 갑자기 "배철수의 음악 캠..."까지 들리더니 다른 노래로 바뀐다.

"아... 라디오 듣다가 녹음한 거라..."

당황한 내가 변명하듯 말한다.

"음악캠프? 별밤은 안 들어?"

"가끔."

다시 또 음악이 흐른다. A면이 끝나고 B면으로 테이프가 넘어간다.

"오토리버스네... 멋진데?"

멋지다는 말이 나한테 한 말인 듯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시끌벅적하던 버스 안에 이제 빈자리가 늘어간다. 풀벌레 소리가 창밖에서 들리는 건지 노랫소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가 흘러나온다. 내려야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쉽다. 


 곧 그 애가 내릴 정류장이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서 훅 불고는 카세트와 함께 나에게 건네다가 도로 자기 품에 가져간다. 놀란 나를 보며 놀리듯 묻는다.

"나 이 테이프 빌려주면 안 돼?"

"뭐?"

"그냥 해본 말이야. 얼긴...  보면 인사나 좀 해. 나 간다."

버스 문이 열리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그 아이가 내린다. 버스 계단을 내려가는 그 아이의 모습이 슬로 모션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쿵쾅거리는 내 심장 박동 소리만 버스에 가득 찬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방을 들고 그 아이를 따라 내린다.


"어? 너 여기 아니잖아."

그 아이가 놀란 눈으로 뒤 돌아 나를 쳐다본다. 갑자기 할 말을 잃는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어딜 봐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어렵게 그 아이의 신발을 보며 말한다.

"아니... 빌려줄게. 이거..."

카세트에서 테이프를 꺼내 쭈뼛거리며 그 아이에게 내민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활짝 웃는 그 아이의 얼굴이 눈이 부시다. 그 애가만히 다가와 테이프를 받아 손에 꼭 쥔다.

"진짜지?"

그 애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웃음을 머금고 쳐다보는 그 아이의 얼굴을 흘깃 보고 고개를 돌린다. 온몸이 심장과 함께 뛴다.

"주말 동안 듣고 꼭 돌려줄게.  근데... 이거... 나 녹음해도 돼?"

"어?... 어..."

마음이 벅차오른다.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머리만 긁적이다 머쓱해진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고마워! 가! 안녕!" 

통통 튀는 목소리로 인사하며 테이프 쥔 손을 작게 흔든다.

"어...  안... 녕..."

마주 본 채로 어색하게 뒷걸음치며 처음으로 서로 인사를 한다.


 아주 천천히 발을 뗀다.


 돌아서는 발길에 미소를 거두지 않은 그 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



"아빠! 이거 뭐야? 이것도 버려?"

이삿짐 챙기느라 분주한 아침 창고정리를 하던 딸이 나를 찾는다.

"알아서 해. 아빠도 정신없다."

"버려도 되는지 몰라서 그래. 와봐 한번."

뽀얀 먼지 가득 앉은 상자 하나 가득  카세트테이프가 담겨있다.


 공테이프에 적힌 정겨운 제목들.

My best 1, 2, 3...

Amazing Rock 1, 2, 3...

잠시 뒤적이다 휘갈겨 쓴 테이프들 사이로 단정한 글씨 하나가 보인다.


 그 시절 단발머리 소녀가 눈앞에 그려진다.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상자에 쌓인 먼지를 닦는다.


 같이 넣어 두었던 카세트를 찾으며 조용히 말한다.


 "이건... 가져가야지."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언젠가 또 그날이 온대도

우린 서둘러 뒤돌지 말아요.

마주 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보아요.


가사_잔나비 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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