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27 Kenya, Nairobi
용감한 영혼들의 겁 없는 출발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 중에서
마치 떠나기 위해 잠시 돌아온 사람처럼 나의 여정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은 설렘일까 두려움일까. 잠들지 못한 새벽 2시, 두 눈을 또렷하고 정신은 멀쩡했다. 울리는 알람에 잠들지 않은 몸을 번쩍 일으켜 주방을 향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오전 9시지만 우리 집에서 공항까지는 3시간 반이 소요되기 때문에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언제 생각날지 모르는 라면이기에 계란을 두 개씩이나 넣어 새벽 댓바람부터 거하게 끓여 먹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먹을 비상식량으로 먹을 500g 대용량 나쵸칩과 삶은 계란을 배낭에 넣었다. 배낭을 쌀 때는 몰랐는데 막상 어깨에 메고 보니 묵직한 무게감이 어깨를 통해 전해졌다. 비록 배낭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지만 그와 반대로 나의 마음은 한껏 들떴다.
고요하고 먼지도 가라앉은 상쾌한 새벽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다. 이 차분하고 고요한 거리가 좋았기에 나는 걷기로 결정했다. 새벽 할증 요금이 붙는 택시를 타기가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정말로 단지 걷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ㅓ 주머니 속 이어폰을 꺼내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얼버무리는 가사로 허밍과 함께 따라 불렀다. 걷다 보니 굳게 닫힌 겨드랑이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등짝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조금씩 차오르던 땀은 장마철의 호우주의보처럼 순식간에 온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터미널에는 아직 너무 이른 지 다 켜지지 않은 형광등과 텅 비어 있는 의자에만 보이며 고요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얼마 뒤 올라탄 리무진에도 한 손으로 세어보아도 무방할 만큼 한산한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간밤에 밀린 잠을 자기 위해 의자를 한껏 젖힐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많던 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감은 눈을 뒤로 온갖 잡념이 떠올랐다. 잡념이 잠을 방해하는 것일까 잠에 들지 않아 잡념이 드는 것일까. 이유가 어찌 됐든 나는 다시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생존과 빈곤을 넘나드는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챕터 1:항공권을 예매하다
스카이스캐너로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검색했다. 그리고 인천-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뭄바이(인도)-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나이로비(케냐) 항공권을 예매했다. 경유지가 3곳이나 된다. 걱정이 된다. 하지만 아껴야 한다. 그리고 아직 젊으니까 괜찮다. 젊음이란 그런 것이다. 어떻게든 몸으로 한번 때워 볼 수 있는 거.
#챕터 2:먹고 싶다.
기내식을 제공하지 않는 저가항공에서는 유독 음식 내음이 코를 더 강하게 자극한다. 하필 바로 옆에 앉은 승객이 기내식을 주문했고, 그 냄새에 나의 뱃속이 심히 고동친다. 떠나기 전에 이마트에서 샀던 500g 대용량 나쵸칩을 꺼냈다. 나쵸칩의 고소함과 약간의 짭짤함으로 약간이나마 상대적인 박탈감을 위로해 본다. 그리고 허기짐은 가시고 지루함이 찾아온다. 해야 할 것을 찾는다. 있을 리 없다. 그냥 자야겠다.
#챕터 3:밥을 먹다.
대용량 나쵸칩은 점점 지겨워지고 과자가 아닌 다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행히 말레이시아에서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서 첫 기내식을 받았다. 집을 나서고 20시간 만에 '밥'을 먹어본다. 배고프지만 허겁지겁 먹으며 나의 품격을 잃고 싶지는 않다. 곱곱 씹어 먹으니 밥알에 있는 아밀라아제의 단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조금씩 기력을 회복한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다.
챕터 4:머리 대는 곳이 바로 나의 숙소
뭄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곳에서 13시간 동안 체류해야 한다. 밀린 잠들이 거센 밀물처럼 휩쓸려 온다.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를 하고 잘 준비를 한다. 잘 곳은 딱히 없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몸 뉘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나의 숙소였다.
하지만 모든 의자에 팔걸이가 설치되어 있어 누워서 잠을 잘 수 없다. 어렵사리 잠에 빠져 들 때면 몰려드는 환승객의 웅성거림으로 자다 깨길 반복한다. 이틀 째 누워서 자지 못했다. 애교살 밑으로 널따란 눈그늘이 드리운다. 누워서 자던 때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챕터 5: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다.
티켓을 받아 들고 탑승게이트로 향했다. 탑승시간은 다가오지만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탑승 30분 전인데도 모두가 가만히 있다. 무슨 일일까. 전광판을 확인해보니 잘못된 탑승구에 왔다.
부리나케 다시 다른 게이트로 뛰어갔다. 그런데 아까 있었던 곳이 맞는 게이트였다. 알고 보니 게이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잘못되었다. 핸드폰의 시간을 인도 시간으로 맞춰놨어야 했는데 까먹고 말레이시아 시간으로 그대로 두었던 것이었다. 잠을 못 자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인도 시간으로 다시 맞추고 보니 아직 두 시간이나 더 남았다. 버티자.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
#챕터 6:머리카락
드디어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탔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등허리에는 뻑뻑하게 죄여 온다. 오랜 시간 이동과 불편한 잠자리로 인해 눈은 흐리멍덩해지고 머리카락에는 반들반들한 기름기가 눌러앉았다. 다행히 떠나기 전, 평소보다 꾹꾹 눌러 짰서 머리를 감은 덕분에 샴푸의 잔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카락을 흔들어 털어도 눅눅해진 머리카락들은 얼마나 애틋한지 서로 엉겨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뒷머리는 마치 바둑판처럼 평평하게 눌려 도저히 볼륨감을 찾을 수 없다. 누가 내 꾀죄죄한 모습을 보고 험담할까 무섭다. 이제 배낭에 챙겨온 모자를 써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챕터 7:대장정
드디어 47시간 동안 달려온 대정정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 열심히 달려왔고 오래 달려왔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하품을 할 때마다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정말 지친다. 하지만 청춘이라 괜찮다.
나는 아프리카 청춘이다.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