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놓치다ㅁ

역마살 이야기 32 Ethiopia, Mekele

by 역맛살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 중에서


에티오피아는 독특한 시간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들이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세계공용시간과 에티오피아시간은 다르다. 즉 인터넷에서 검색한 에티오피아시간과 실제 에티오피아사람들이 사용하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큰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메켈레(다나킬투어를 위한 도시)에서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의 수도)까지 가는 버스티켓 일주일 치가 모두 매진되었다. 많은 버스회사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다행히 다나킬투어를 위해 이용한 ETT투어사에서 버스티켓을 구해주었고 한 소년이 직접 숙소에 찾아와 버스티켓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버벅대는 영어로 정류장까지 새벽 3시까지 가야한다고 했다. 그때 나는 에티오피아시간을 말하는 건지 세계공용시간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숙소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보았고, 그들은 내게 새벽 5시라고 말해주었다.

두 가지의 시간체계때문에 매우 혼동됐지만 아침버스가 설마 새벽3시에 출발할까 생각하며 몸이 편한 쪽으로 균형추를 기울였고, 동시에 그대로 피곤한 몸을 배게맡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어 숙소를 나섰다. 역시 새벽 5시 버스가 맞았는지 메켈레공원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버스티켓을 보여주며 내가 타야할 버스가 어느 것인지 물었다.

- “하베샤버스는 어디에 있나요?”

- “하베샤? 그거 30분 전에 떠났어.”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하며 하베샤버스 사무실로 향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역시 똑같았다.

-“하베샤버스는 이미 떠났고 오늘은 버스가 없어.”

-"그럼 다음 버스는 언제 있나요?"

-"일주일치가 다 매진돼서 다음 버스는 일주일 뒤로 예약할 수 있어."


혹시 다른 버스에 남은 좌석이 있을까 급히 돌아다녀봤지만 상황은 다른 버스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마음이 무질서하게 헝클어진 나는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우연처럼 무슨 방법이라도 머리 속에 툭 떠오르기 바랐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이미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 친구가 멍하니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승합차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며 알려주었다. 그런데 승합차를 타고 갈 경우 가격은 버스보다 2배는 비쌌고, 문제는 당장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저 가지고 있는 것은 밥을 먹기 위한 약간의 여윳돈과 10달러밖에 남아있지 않은 비상금이 전부였다. 그래서 허덕지덕 그 친구와 함께 ATM으로 향하여 돈을 인출하려고 했지만 여러 곳을 돌아다녀봐도 ATM은 내 카드를 인식하지 못했다.

승합차에는 이미 아디스아바바를 가기 위한 승객들로 모두 찼고, 그들은 나 한 명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 급해졌다. 그렇게 여기저기 ATM 찾기를 반복하다 운전기사는 패닉상태의 나를 딱하게 여겼는지 마지못해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승합차는 달렸다. 마치 F1 그랑프리처럼 달렸다. 깜깜한 새벽에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니 방지턱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럴때마다 승객들은 하늘로 솟구쳐 천장에 정수리도장을 쾅쾅 찍었다. 키가 작았던 탓에 늘 누군가 내뱉는 아랫공기만 마시며 세상을 우러러 보던 겸손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머리가 자동차 천장에 닿는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쏘고 가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승객이 당장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처럼 운전기사와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차로 옮겨 타야하는 상황같았다.

옮겨 탄 차는 굉장히 낡은 버스였다. 에어컨 하나 작동하지 않은 낡은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태양을 머금은 열기로 인해 빠르게 뜨거워졌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들이 들어와 호흡기로 파고들었고, 앞에 탄 누군가 심한 멀미를 한 탓에 시큼한 위액냄새가 버스를 채웠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특유의 주술처럼 반복하는 불가항력의 돌림노래는 끊임없이 나의 고막을 두드리며 괴롭혔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엉기는 고통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담담한 인내로 버티는 길 밖에 없었다.

버스는 휴게소에 정차했고 배가 고팠지만 돈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식당에 들어갔고, 나는 홀로 남아 그늘 진 곳 앉아 주머니에 있던 콩사탕을 꺼내어 조금이나마 공허한 속을 위로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아무리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이었더라도 그 속에서 내가 행복했었음을 깨닫게 해주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굶주리고 있을 때면 지긋지긋한 취업 준비에 아등바등하던 때 가끔씩 친구들과 모여 국밥을 먹던 게 그리워진다.

먹고 싶다, 순대 국밥, 내장 국밥, 돼지 국밥, 따로 국밥, 섞어 국밥, 콩나물 국밥, 소머리 국밥.

그래도 국밥 중에 제일은 역시 순대국밥이다. 고기 누린내가 은은하게 나는 허름한 국바집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을 주문하고, 잠시 후 삶의 애환을 녹여줄 따끈한 국밥이 뚝배기에 담겨 나온다. 그 안에는 아직 다데기가 덜 풀어져 희뿌연 빛깔의 국물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끓고 있는 자욱한 연기에서 담백한 고기 국물의 향이 느껴지고, 그곳에 들깨 가루 두 큰 술을 크게 떠서 국 휘휘 저어주니 들끓던 국물은 온순하게 가라앉는다. 취향에 따라 새우젓갈 약간과 파릇파릇한 부추를 크게 두 젓가락 넣어 휘휘 저어준다. 그리고나서 국과 밥알과 내장의 적당하 비율로 한 숟가락 떠서 빨갛게 잘 익은 깍두기 하나 얹고 입김으로 후후 불며 약간 식혀 입에 넣어준다. 국밥이 입에 들어오면 적당한 바깥 공기를 빨아 들임과 동시에 뜨거운 밥알과 내장을 요리 조리 굴려 식혀준다. 국물을 먹다 잠시 좀 더 매운 맛이 필요하면 풋고추와 양파를 쌈장에 크게 찍어 깨물어 먹는다. 뚝배기에 담긴 국밥이 점점 바닥을 드러낼 즈음 받침대에 뚝배기를 살짝 걸쳐 기울여준 뒤 남은 국물을 마무리 해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소소했던 일상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평범함도 내 삶의 행복이었구나. 그립다 순대국밥. 아니 그립다 그때의 평범했던 일상.


잠시 머릿속에 흩날리는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젖어 있을 즈음, 밥을 다 먹고 나온 한 사내가 왜 밥을 먹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 불쌍하고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에게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메켈레에서 나와 같이 미니버스를 탔던 사내였고, 그는 내가 밥을 먹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실 돈이 별로 없어. 그런데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아서 먹지 않는 것뿐이야 걱정하지마.”

그리고 갑자기 그는 나를 붙잡고 식당으로 들어가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라고 했다. 나는 한사코 거부하다 결국 못 이기는 척 양고기를 주문했다. 드디어 단내가 가득했던 입으로 양고기스튜가 들어간 인제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잘 숙성된 인제라의 발효향과 양고기 기름의 매끄러움이 부드럽게 섞이며 조화를 이루었다. 배고픈 순간이니만큼 시큼한 인제라가 참으로 상큼했다.

인제라는 우리나라의 쌀밥을 먹는 것처럼 먹는 에티오피아의 주식이다. 다만 어떻게 핫케익처럼 생긴 모양에서 어찌 그리 식초 쏟아 부은 것처럼 기이하면서 시큼한 맛이 나는 신기한 음식이다. 하지만 가녀린 위장에 단비처럼 내린 인제라는 축복의 음식임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버스는 또 다시 달렸고 먼지는 날렸다. 시끄러운 음악도 끈질기게 달팽이관을 괴롭혔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은, 멀리서 온 '이방 거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먹고 있던 과일이며 물이며 간식들을 내 손에 쥐어주었고 심지어 새신발까지 주었다. 글쎄 조금 더러워 보였을 뿐 나의 크록스신발 아직 쓸 만 했는데 이렇게 신발을 선물받게 되니 내가 그렇게 안쓰러워보였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긴 여정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사람들과 함께라서 그 지루함과 고통도 나름 견딜만 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낡은 버스는 과연 목적지 갈 수 있을까 했던 나의 의심을 말끔히 없애고 17시간만에 드디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인 줄 알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픽업을 요청하기 위해 약속을 잡았던 ETT여행사 가이드가 보이지 않았고, 사무실에 직접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에게 밥을 사주었던 브라한이 지금같이 늦은 시간은 매우 위험하니 자신이 머물 숙소에서 기다렸다가 전화가 오면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서 숙소에 향했다.

그러나 시간도 이미 저녁 11시가 넘었고 ETT여행사에서 전화가 다시 올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브라한은 저녁이라서 너무 위험하니 자기 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떠나라고 했다. 그의 호의에 백 번이고 감사하지만 숙소는 너무나도 열악했다. 침대의 이불은 우기인 탓에 눅눅하다 못해 축축했고, 알 수 없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온 방 안에 가득했다. 또한 침대 바로 옆에 위치한 1평 남짓의 샤워실에서는 물도 나오지 않을 뿐더러 심한 오줌냄새까지 올라왔다. 다시 한번 브라한의 호의에 감사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ETT여행사에서 부디 나를 태워가도록 간절히 바랐다.

신이시여,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을 주시옵나이까. 부디 저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제가 설사할 때는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이번에 응답해주시옵소서. 더이상 지난 일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합니다 신이시여.

신은 저번과 달리 오늘은 야근을 하시는지 늦은 시간임에도 간절한 나의 기도에 응답했고, 나는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도착한 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에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으슬으슬거리는 몸을 담요 밑으로 깊이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노곤했던 하루의 일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가기 시작했다.


항상 흘러간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인지 막상 지나고 보니 그렇게 썩 나쁘지도 않았다. 하긴 돌이켜본 시간들은 언제나 그때의 고통을 몸소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을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하다보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힘든 시간이 지나가버리고 그 결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처음에야 내가 정해놓은 대로 되지 않았기에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평범하지 않지 경험뿐만 아니라 덕분에 많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게 됐다. 확실한 것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풍성한 하루였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오늘 나의 하루를 채워 준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힘든 하루를 버텨 준 나에게 감사한다.


나는 생각대로 되는 게 '행복'이고 계획대로 되는 게 '능력'인 줄 알았는데

삶을 돌아보니 '우연'이 가져다 준 선물이 훨씬 많았다.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경험, 계획하지도 않았던 만남.


그래, 어쩌면 삶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계획대도 되지 않는다고

너무 아쉬워하고 낙담할 필요는 없겠구나.


인생에는 항상 우연이 선사하는 특별한 날들이 있으니.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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