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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Dec 07. 2018

영국 여행

1.


14년 1월쯤에 영국에 간 적이 있다. 그 지난해 2학기 나는 목동의 아파트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이모부가 올림픽이었는지 뭔지를 취재하러 가족을 데리고 영국에 가 있었고, 집 볼 사람도 구할 겸 내가 어쩌다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아침마다 한 시간 하고도 반을 걸려 학교를 가던 게 40분으로 줄어들었으니 나로서는 손해 볼 건 없었다. 손해 본 게 있긴 있구나. 학점.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모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영국에 한 번 놀러오라 불렀기에 6박 7일 일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모네 가족은 영국 남부 해안가의 휴양도시 이스트본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촌동생 – 10살짜리 여자애와 6살짜리 남자애 – 들은 한국말은 거의 잊었는지, 그 특유의 영국 발음으로 끊임없이 깐죽거렸다. 고상하고 우아하게만 생각했던 영국 발음이 그렇게도 듣기 싫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집은 작은 정원이 딸린 근사한 아파트였지만 난방 시스템이 한국과는 달라서 더럽게 추웠고, 집 근처에 볼거리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며, 타고난 길치인 나는 집 앞 산책에도 길을 잃기 일쑤였고, 5시만 돼도 온 동네가 깜깜해졌고 가게들은 죄다 문을 닫았으며 바람이 끔찍하게 불었다. 한 마디로,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영국까지 왔는데 돌아다녀 봐야 하진 않겠는가. 그래서 아침마다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스트본 역에서 기차를 타고 빅토리아 역으로. 창 밖에는 푸른 초원과 우중충한 하늘이 보였고, 가끔은 고속도로 옆에 뛰어다니는 말들이 보였고, 양들도 있었다.


기차를 내려 우선 담배를 한 갑 샀다. 그 당시 담배 한 갑이 2,500원 할 때였는데 대충 5배는 더 주고 샀으니까 무지하게 비쌌던 셈이다. 참, 영국에서는 정말 아무나 담배를 다 피운다. 유모차 끄는 어머니, 양산을 든 할머니, 파이프를 문 할아버지, 경찰, 후드를 뒤집어쓴 젊은 남자, 여자, 신사, 숙녀, 간접흡연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지 사방 천지에서 담배를 피운다. 길을 걸을 때도. 대신 꽁초가 딱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구멍이 뚫린 쓰레기통이 대략 20m 간격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여튼 나도 담배를 피우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간에. 바쁘게.


지금 생각해보니 하루에 적어도 10km는 걸었던 것 같다. 도무지 대중교통은 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걸었다. 템즈 강도 보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도 보고, 빅 벤도 보고, 이 궁전도 보고 저 궁전도 보고, 승마 박물관도 가고, 셜록 홈즈 박물관도 가고, 하이드 공원도 가고 하여간 평발이 아프도록 걸었다. 걸으면서 혼자 어딜 들어갈 용기도 없어서 EAT.이라는 체인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공원에 앉아 먹었다. 더럽게도 추웠다. 그리고 외로웠다. 하루를 꼬박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의 창밖으로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바닷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이스트본으로 다시 돌아올 때, 얻은 것은 아픈 다리와 하루 종일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고독감뿐이었다. 그리고는 새삼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이 거리에 아무도 아니며,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당연한 소리지마는.


아마 닷새째였을 거다.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우뚝 솟은 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넬슨 제독의 동상을 지날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입에 계속 들어갔고, 비는 오다 말다 우중충하게 내렸으며, 종일 걸어서 다리는 아팠고,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여타의 이유들로 해서 나는 더없이 우울했다. 널찍한 광장에 도착했을 때 멀리 영국자연사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가 보였고, 광장 위에선 몇 명의 공연자들이 저마다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치마를 입고(그 날씨에!) 백파이프를 부는 사람, 팬터마임을 하는 사람,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사내는 테크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한 가족이 요란스럽게 사진을 찍는다. 잠시 공연을 나는 내셔널 갤러리로 향했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전시중이라고 한다.


들어가자마자 발길을 돌렸다. 대충 2층짜리 건물의 계단까지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으니까. 먼발치에서라도 볼까 싶었지만, 남의 뒤통수나 실컷 쳐다볼 기분이 아니었다. 길고 이리저리 꼬인 복도를 지나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오니 비가, 이번에는 꽤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하릴없이 나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옆에서는 아까 봤던 검은 양복의 대머리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도 따라 불을 붙였다.


‘Hey.’


그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

그래, 너. 어디에서 왔어? 중국?

아니.

오, 그럼 일본이구나! 곤니치와.


그가 어색한 발음으로 과장되게 절을 해 보인다.


아니, 한국에서 왔어. 남한.


눈에 띄게 그는 반가워한다. 에버랜드에서 그는 3년 동안 댄서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말하며 그는 씩 웃어 보인다. 앞니가 벌어져 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눈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한다. 집시가 떠올라, 나는 무심코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깊이 넣었다.


아까 너 서서 구경하는 걸 봤어.


날 봤다고?


그래, 다른 사람하고는 달라서.


다르다니?


너는 그냥 보고 있었잖아. 저 멍청한 놈들하고는 다르게.


말하면서 그는 아까의 그 가족을 가리킨다. 공연자 옆에서 아내는 포즈를 취하고 있고, 남편은 정신없이 그것을 찍고 있다.


저 새끼 보라고. 사진 한 장 찍겠다고 제 마누라한테 한 번 안겨 봐라, 포즈 취해 봐라, 온갖 난리를 치는데. 자존심도 없는 거야.

그런가.


그렇다니까. 내가 저기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온갖 놈들이 다 있어. 제 마누라까지 팔아먹는 놈은 예사라고. 그래놓고는 돈 한 푼 던져 넣고서는 가 버리지. 그래서 네가 맘에 들었던 거야. 사진도 찍지 않고, 돈도 넣지 않고, 그냥 내 예술을 보고만 있었잖아.


흥분해서 연기를 내뱉으며 그는 말을 잇는다. 이제 선글라스를 벗은 그의 눈은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의 동유럽 악센트도 그렇다.


내가 한국에서 춤을 출 때는, 행복하지 않았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옷을 입고, 시키는 대로 춰야 했으니까. 그래서 때려치웠어. 지금 나는 행복하고 더없이 자유로워.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나는 내 스스로의 주인이야. 가끔 날씨가 좋은 날에는 광장에 나오지 않고 산책을 가거나 술을 마시기도 해.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할 수 있어. 어디에도 고용되어 있지 않아.


그런데 길거리 공연 하면 먹고 사는 데 힘들지는 않느냐, 하고 나는 얼빠진 질문을 던졌다.


아니, 지난주만 해도 이만큼이나 벌었는걸, 하고 그는 씩 웃었다. 두 번째 담배를 피워 물고, 그는 광장을 향해 경멸이 가득한 손짓을 해 보였다.


저 새끼들은 순 가짜야. 돈 한 푼에 눈이 멀어서 온갖 수작은 다 부려. 자존심도 없고, 신념도 없고, 긍지도 없어. 저 놈들은 예술가가 아냐. 나? 나는 예술가지. 돈 때문에 이걸 하는 게 아냐. 순전히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고향에는(나는 다시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집시들이 많아. 일도 하지 않고, 구걸이나 해 대는 거렁뱅이 놈들이야. 나도 집시 출신이지만 난 안 그래. 성실함이 중요한 거야. 동시에 자신에게 충실해야 하지. 나는 쉬고 싶으면 쉬고 일하고 싶으면 일해. 저놈들은 아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똑같은 거지같은 마술이니 백파이프니 개수작이나 부리면서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에나 정신을 판다니까.


세 대 째의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서 왔는지(우리는 둘 다 서로의 고향의 이름을 발음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 보았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이름은 무엇이고 – 불행하게도 나는 이 괴짜 예술가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 나이는 어떠한지에 대해. 영국의 날씨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거지같은 날씨에 대해 의견의 일치했다. 거지같은 영국 음식에 대해서도. 나는 샌드위치밖에 먹어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영국에는 샌드위치가 제일 맛있다고 주장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 끝에,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어느 샌가 비가 그친 하늘에는 -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그는 씩 웃으며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테크노 음악에 맞춰, 어딘가 알 수 없는 춤을 추면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비가 그친 거리로 다시 걸어 나갔다. 핸드폰은 여전히 주머니에 있었다. 나는 묘한 행복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도 가끔 그 기묘한 만남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상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얻은 것은 그뿐이다. 셜록 홈즈 박물관에서 5만원인가 얼마 주고 샀던 파이프와 담배는 자주 다니던 술집 사장에게 줘 버렸고, 홍차 세트는 몇 번 타 먹고는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버렸으며, 지금도 후회하는 휴대용 체스 세트는(덩치 좋은 푸른 눈의 노인네가 나를 속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반짝거리던 그의 눈과 격한 손동작, 검은 양복, 선글라스, 벌어진 앞니, 대머리, 목소리, 억양 같은 것들은 지금도 떠올리려 하면 떠올릴 수 있다. 인류의 복된 유산이 잠든 박물관 앞에서 낯선 이와 행복이니 자유니 예술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을 나는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에 어떤 교훈은 없다.


나는 다만 어렴풋이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떤 진리나 깨달음 같은 것은 위대한 화가의 그림이나 위대한 건축가의 성당이나 위대한 장군의 동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을 수도 있고, 길가 볕 드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수도 있고,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길 위에서 우연히 찾아온다. 운이 좋다면, 당신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 수도 있다.


낯선 사람들은 길 위에서 만나고, 잠시 비를 피하고, 담배를 나눠 피우며, 연기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비가 그치면 그들은 다시 각자의 길을 나선다.


때로는 그것만으로 인간은 행복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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