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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y 21. 2019

빛을 먹는 짐승

옛날 옛적에, 빛을 먹는 짐승이 살았다.     


빛은 찬란하고 밝은데다, 아무 곳에나 눈치도 없이 새어들어 검은 피부를 콕콕 찔러댔기에 짐승은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깊은 동굴도, 넓은 호수도 커다란 짐승을 모두 숨겨 줄 수는 없었기에, 짐승은 빛을 삼키기로 했다.   

  

빛을 삼키는 일은 보통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마을로 내려가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 문에는 빗장을 걸고 창에는 장막을 쳤다. 우지끈, 뚝딱, 짐승은 지붕에다 무거운 발을 얹어 집채로 뭉개 버렸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횃불이며 총을 들고는 짐승에게 사납게 불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짐승은 입을 크게 벌려 꿀꺽, 하고 불과 빛을 삼켜 버렸다. 뱃속이 사납게 요동치며 쓰라렸다. 마침내 모든 빛과 불을 삼켜 버리고 나자, 사람들은 절망하며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서로를 붙들고 울었다.     


아늑한 어둠 속에 짐승은 잠이 들었다. 달은 무서워 몸을 떨며 가늘게 숨어 버렸다.      


눈을 뜨고 보니, 짐승은 더욱 커져 있었다. 저 멀리서 피를 토하는 산이 있었다. 산에 다가가자, 아파서 절규하며 성을 내었다. 뜨겁게 빛나는 물이 짐승의 다리를 헤치고 삼켜 버리려 들었다. 당황한 짐승은 앞발을 들어 산꼭대기를 세차게 후려쳤다. 굉음을 내며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터져 검은 털가죽에 달라붙었다. 아이고, 뜨거워라. 짐승은 입을 크게 벌려 화산의 혈맥을,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빨아 버렸다. 뱃속이 사납게 요동치며 쓰라렸다. 마침내 모든 빛과 불을 삼켜 버리고 나자, 산은 안심하고 납작해져 짐승의 잠자리가 되었다.      


무거운 어둠 아래 짐승은 잠이 들었다. 구름은 조용히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세차고 빠르게, 벼락이 짐승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굉음과 함께 큰 뿔이 부러지고 말았다. 단잠에서 깬 짐승은 자랑이었던 뿔이 박살난 것을 알고선 분통이 터져 하늘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벼락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스치기만 해도 따갑고 쓰라렸다. 구름은 묵묵히 친족들을 불러모아 검은 짐승 위에 밝은 빛의 기둥을 던져댔다. 짐승은 크게 숨을 마셨다. 후우욱, 뱃가죽이 부풀어오른 고래의 시체만큼이나 커지자 천둥소리를 내며 짐승은 바람을 내뱉었다. 구름은 하릴없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미처 가져가지 못한 벼락 한 줄기를 짐승은 입을 크게 벌려 칼을 삼키듯 삼켜 버렸다. 마침내 모든 빛과 불을 삼켜 버리고 나자, 하늘도 땅도 깜깜해져, 더 이상 빛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어둠만이 아늑하고 무겁게 세상을 내리눌렀고, 짐승은 행복한 한숨을 내쉬며 깊고 오랜 잠에 빠졌다.     


옛날 옛적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어둠 속에서 자란 아이는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 삼촌과 이모, 형제와 자매와 마찬가지로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대신 발달한 귀와 코와 손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둠이 떠오르면 아이는 노인들의 울부짖음과 흐느낌을 들으며 일어나, 어둠이 중턱에 걸릴 쯤에는 사냥을 해 식사 준비를 하였고, 이윽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잠에 들었다.      


아이야, 빛을 그리워하거라. 노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아이는 빛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어둠은 친숙하고 또 아늑해서, 따갑고 뜨거운 빛의 온기가 무엇인지는 말로 들어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빛은 먹는 건가요? 아니란다. 빛은 소리인가요? 아니란다. 빛은 막대기인가요? 아니란다, 아이야, 아니야. 빛은 -      


노인들은 우물거렸다. 빛이 무엇이지?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 그들은 빛이 있고 세상이 있었는지, 세상이 있고 빛이 있었는지를 잘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울부짖으며 빛을 삼켜 버린 저 저주받을 짐승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는 자랐고, 천리 밖의 소리와 냄새를 알며 민첩한 손끝으로는 물의 맑음을 구분할 정도가 되었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아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빛이란 무엇일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리도 그리워하는 것을 보니 분명 대단한 것일 테지. 그래서 아이는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리 탐탁해 하지 않았으나, 몇 남지 않은 노인들은 반색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어디도 드러나 있지 않았기에 모두 한가지였고, 코 끝에 맴도는 희미한 재와 연기의 냄새를, 그리고 조용히 울리는 숨소리를 따라 아이는 걸었다. 몇 어둠 몇 암흑을 걸었을까, 저 멀리 아이는 크나큰 무언가를 감지했다. 조심스레 다가간 아이는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마을서 제일가는 부자의 대궐보다도, 깊고 차가운 호수보다도 커다란 존재를 만졌다. 부러진 뿔은 단단했고, 숨소리는 귀를 찢을 듯했다. 날려갈 듯한 콧바람을 간신히 피하며 아이는 들고 간 창을 짐승의 눈구멍에 깊게 꽂아 넣었다.     


고통에 차 찢어지는 굉음을 지르며 짐승은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어떤 맹랑한 놈이 자는 몸을 깨우느냐, 아래를 내려다보자 짐승은 작은 사람의 아이를 보았다. 창에서 붉고 따뜻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자 짐승은 더더욱 화가 났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잠을 깨우느냐, 나는 불타는 물과 내리꽂히는 말뚝과 날아드는 재를 삼키었도다. 달도 구름도 산도 나를 두려워해 숨어 버리었도다. 내 말에 떨며 달아나지 않는 너 구더기 같은 것아, 너는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빛을 따라 왔습니다.     


아이가 담대히 말했다. 그러자 짐승은 온 어둠이 울리도록 코웃음을 쳤다.     


너 인간의 아이야, 어둠의 종자야. 너는 빛이 무엇인지 모른다.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돌려받으러 왔느냐.

그렇습니다, 저는 불과 재의 냄새를 따라 왔습니다. 아직 당신의 뱃속에는 빛이 담겨 있어요.   

  

짐승은 덜컥 겁이 났다. 저 꼬마가 하는 말이 정말인가?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동안, 짐승은 꿈을 꾸었다. 꾸르륵, 우르릉, 쾅, 뱃속에서는 아직 화산과 벼락과 불씨가 날뛰는 것도 같았다. 자다가 하품을 할 때면 어딘가 그을리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마다요.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제가 영영 빛을 없애 드리겠습니다.       

그런 얄팍한 수에 내가 걸려들 줄 알고? 짐승이 물었다.     


아닙니다, 진심이올시다. 어둠 속에 산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나 빛을 잃은 사람들도 빛을 잊었습니다. 이제 와서 빛이 돌아온다 해도 두려울 뿐입니다.

     

짐승은 곰곰이 생각했다. 저렇게 조그마한 꼬마가 수를 쓴다 해도 나처럼 강대한 존재를 이길 수는 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하고 짐승은 동의했다.     


좋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느냐?    

  

제가 큰 주머니를 가져 왔습니다. 꾀바르고 수가 많은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든 물건입니다.      


그 주머니는 검은 쥐의 털로 만든 평범한 봇짐에 다름없었으나, 짐승은 솔깃하여 말했다.     


그 작은 주머니가 빛과 불을 다 담을 수 있느냐?    

그렇고말고요, 이 주머니 안에는 어둠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어둠이 있어 빛이란 빛은 죄다 삼켜 버린답니다.    

그래, 좋다, 좋아. 그 다음에는?     

자, 제가 주머니를 당신의 입 앞에 대겠습니다. 이걸 잘 쥐고 입을 둥글게 모아 숨을 내뱉으세요. 다 뱉으시면 제가 끈을 단단히 여미겠습니다.      

좋다, 좋아.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말아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짐승은 손가락에 간신히 잡힐 정도의 크기인 주머니를 펼쳐 입 앞에 대었다. 그리고 가볍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아이는 창으로 짐승의 나머지 눈알을 꿰뚫어 뽑아 버렸다.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며 짐승은 길길이 날뛰며 아이를 산 채로 씹어먹겠노라 부르짖었다.      


그리 성내지 마라, 약속은 지키지 않았느냐. 빛도 어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아이는 낄낄거렸다.     


마침내 짐승은 눈구멍에서 피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쳐 뻗어 버렸고, 아이는 쓰러진 짐승의 목을 깊게 베어내었다. 네 쌍의 다리와 꼬리까지 모두 베어내고 나자 짐승은 배가 부푼 풍선처럼 되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아이는 희열에 차 소리쳤다. 그리고 가져간 창으로 부푼 풍선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그 순간, 세차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짐승의 배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밝고 너무도 뜨거워서, 아이가 그것이 빛이란 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화산처럼 세차게, 벼락처럼 빠르게 빛과 불꽃의 덩이는 하늘로 솟구쳐 해가 되었다. 솟구친 태양은 곧 어둠을 모두 거두었다. 하늘과 끝, 땅의 끝, 바다와 호수의 끝까지 빛은 재빠른 화살이 되어 날아가 온 세상을 덮었고, 빛은 어둠 속을 기던 인간들에게도 가 닿았다.


노인들은, 그것이 나이 때문인지, 기나긴 암흑의 세월 때문인지는 몰라도 빛을 바로 알지 못하였으나 피부에 와 닿는 온기에 저주받을 적이 쓰러졌음을,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낡고 삐걱거리는 뼈를 움직여, 비로소 구분된 하늘을 올려다보며 땅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주름지고 비쩍 마른 볼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아, 빛이다, 빛이 드디어 돌아왔다!      


그러나 사위를 둘러보고, 나이든 자들은 비통에 몸부림쳤다. 우리의 자식과 손주들의 몰골을 보라. 추한 어둠 속에서, 온 몸에는 검은 털이 자랐고, 발에는 발굽이 돋았으며, 머리에는 검고 구부러진 두 뿔이 오만하게도 하늘을 찌른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는 엄니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으며, 네 쌍의 다리로 땅을 기며 기이한 소리를 내도다.      


아아, 우리의 자손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저들이 우리보다 평안함이라 우리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이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빛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빛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우리가 우리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라, 기뻐하라


노인들은 기뻐하지 못하였으니, 곧이어 타오른 태양에 불타 스러지고 말았다. 그들의 자손들은 빛이 떠올랐으나 그를 깨닫지 못하고 네 쌍의 다리로 지상을 기고 또 기어다녔다, 기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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