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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ul 27. 2019

육식에 관한 고찰

음식에 대해서 글을 써 보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 딱히 쓸 이야기는 없다. 이것저것 맛있는 걸 찾아 먹기는 하지만 원체 밥통도 작은데다가 가끔은 밥 먹기가 귀찮아서 굶기도 하니까. 나만 그런가? 밥 먹기 너무 귀찮을 때가 있잖아. 그럴 때면 차라리 빵으로 대충 때우고 말지.


닭 얘기나 하자. 난 닭이 좋다.


1.


옛날에, 경북 고령의 한 시골마을(우리 집에서는 새까지라고 불렀는데)의 할머니 집에서는 마당에다 닭을 몇 마리 키웠었다. 쎄멘(시멘트)을 발라 놓은 한 구석에는 두엄더미가 있어서 거기다 음식물쓰레기도 버리고 쌀겨도 버리고, 심지어 어린 나는 거기다 똥도 쌌다(산에서 싸기엔 산모기들이 알궁둥이를 사정없이 물어뜯었고, 역시 쎄멘으로 지어 놓은 화장실에서는 맡아 본 적은 없지만 1차대전때 썼다던 생화학 가스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럼 닭들은 돌아다니다가 두엄더미에서 벌레나 과일껍질이나 - 음, 생각하기는 싫지만 - 아마 똥에 섞여 있을 무언가도 먹었을 것이다. 좀 더럽군.


하여튼 그런 닭을 가끔 잡을 일이 생겼다. 우리 할머니께선(지금은 돌아가셨으나) 키가 좀 땅딸막하게 작으시고 약간 똥똥하신데다, 평생 농사만 지으셔서 무릎이나 허리도 좋지 않으셨는데, 닭을 잡을 때면 느릿느릿 걸으시다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번개처럼 달려들어 재빨리 모가지를 꺾으셨다. 어린 마음에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빠를 수가 있구나, 해서. 이건 방법 중 하나고,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 큰외삼촌 식인데, 닭을 붙잡는 것까지는 같다. 붙잡고 난 다음에는 무릎으로 눌러 칼로 목을 짼다.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수돗가에서 흘려보내면 축 늘어진다.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그 다음에는 적당히 뜨거운 물에다 한번 데친 다음 털을 뽑고 배를 갈라 내장을 손질해 요리하면 된다. 내가 그 닭들을 먹었던가, 무슨 맛이었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먹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 한 통이면 집앞까지 배달되는 편하고 맛있는 치킨을 내버려두고 그 개고생을 하면서까지 닭을 잡을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까.


잔인하다고? 비윤리적이라고? 글쎄.


2.


가끔 유튜브에서 사냥한 짐승이나 가축을 도축하는 영상을 찾아보곤 하는데(실로 유튜브에는 없는 것이 없다) 이것은 내가 싸이코패스나 동물학대를 보며 흥분하는 이상성욕자라서가 아니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1) 언젠가 써먹을 날 - 예컨대 핵전쟁이나 좀비 아포칼립스 - 이 올지도 모르니까

2) 독자들께서도 어릴 적에 한번쯤은 읽었을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로빈슨 표류기'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시크래프트를 동경하기 때문에


정도가 되겠다. 보다 보면 숙련된 솜씨에 감탄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그런데, 그런 영상을 보면 (유튜브답지 않게) 싫어요 수가 압도적이다. 업로더가 영상 시작 전에 'Graphic, extreme gore'라고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 줬는데도 굳이 찾아와 보고선 싫어요를 누르는 심리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서도, 어쨌든 댓글을 보면 비난 일색이다. '잔인하다', '비윤리적이다', '어떻게 불쌍한 동물에게 저런 짓을 할 수 있냐', '야만적이다', '징그럽다' 등등. 보다 원색적인 댓글을 보자면 - '저건 완전한(downright) 살인이다', '어떻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등이 있겠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불을 발견해 고기를 구워 먹고 뇌도 커지고 두 다리로 서서 도구를 만들어, 몽둥이로 옆에 있는 인간의 대가리를 깨부순 이래로 문명은 발달해 왔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게 되자 사냥과 도축은 물론이요 죄책감까지 함께 외주를 주었으니까. 동서고금을 통틀어 백정이나 푸주한이 좋은 대접을 받는 역사나 민담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당장에 피가 튀고 내장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징그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데,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영상 시청자의 대다수(적어도 채식주의자들을 제외한) 보다, 영상의 제작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훨씬 더 윤리적이며 인도적이다.


3.


사냥꾼을 보자. 먹을 만큼 잡고 잡은 것은 버리지 않고 먹는다. 더 잡더라도 전체 개체수에 위협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혹은 지나치게 불어난 개체를 조절하는 뜻으로 잡는다.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밀렵꾼들이나 트로피 헌터를 빼고). 단 한 발의 총알로, 단 한 번의 내려침으로 목숨을 끊는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른 생명과 온전히 대면한다. 이기든 지든 간에. 어차피 이기는 쪽은 정해져 있으니 위선적인 것이 아니냐고? 그럴지도. 그런데, 적어도 목숨을 끊는 그 순간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진실하다. 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가져가고 그 무게를 짊어진다. 눈을 돌리지 않는다. 죽어감의 과정을 온전히 담는다.


실제로 사냥꾼들은(적어도 전통적 사냥꾼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변화나 개체수의 변동에 민감하다고 한다. 당연하겠지. 줄어들면 당장 굶어죽을 테니까. 실제로 짐 코벳과 같은 위대한 사냥꾼은 평생을 자연과 환경보호에 헌신했기도 하고.


배가 고프다. 핸드폰을 켠다. 배달 앱에 들어가 버튼 몇 번을 누르면 곧 벨이 울리고, 나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를 치킨을 야무지게 주둥이에 처넣는다. 나는 정당한가? 물론, 당연히 정당하다. 돈을 냈으니까. 내가 돈 내고 먹겠다는데, 이 닭이 어찌 뒈졌는지는 내 알바 아니고 다만 내게 있어서는 상품일 뿐이다.


누가 더 윤리적인가? 누가 더 인도적인가? 둘 다 떠나서, 누가 그나마 덜 위선적인가? 칼을 들고 짐승의 목을 찔러 피를 뽑는 사냥꾼과, 한 손에는 닭다리를 들고 유튜브를 보며 '잔인하다'고 댓글을 남기는 나 중에서?


4.


육식에는 - 적어도 육식 그 자체에는 - 잘못된 점이 없다. 육식을 부정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불과 사냥으로 인류는 진화했으니. 아니, 비단 인류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생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다른 생명을 집어삼키도록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태어날 것이다. 거기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약간의 미안함과 죄스러움 정도면 됐지,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100% 위선에 불과하다. 인간은 생명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위선자에 불과할 따름이고. 그냥,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살자. 죄책감 없는 죄인은 적어도 위선자보다는 나으니까. 우리는 생명을 집어삼킨다. 그것도 끊임없이. 탐욕스럽게. 그렇게 태어났으며 그렇게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채식주의자들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한다(가끔 보이는 그들의 독선적인 선민의식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몇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들이 듣는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도 나는 분개한다(예컨대, 식물도 생명이고 고통을 느끼는데 왜 먹음? 과 같은. 더럽게 멍청한 소리다. 식물에게는 신경세포도 뇌도 없다. 따라서 통각도 없으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우리가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한다면 그나마 무생물에 가장 가까운 생명이 덜 죄스럽지 않나?)


또한 그들의 주된 논리에 대해서도 나는 공감한다. 맞다. 어떤 육식은 진실로 비윤리적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고 있는 공장식 도축 시스템이 그것이다. 그곳에는 생명에 대한 경의가 없다. 사냥꾼과 사냥감이 맞부딪치는 투쟁도 없다. 스러진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무게도 실려 있지 않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몸부림도 없고. 다만 하나의 부품처럼, 개체는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상품화되어 '생산'되어 '출하'된다. 그리고 가격이 매겨져 어딘지도 모를, 뭣도 모르는 소비자들에게 깔끔히 포장된 채로 팔려나가 요리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먹는다. 별 생각 없이. 맛있다. 맛있기야 당연히 맛있지. 죄책감이나 비난도 외주를 맡겼으니까 더더욱 맛있다.


5.


나는 채식주의자가 될 생각도 없고 될 가능성도 없으며, 횡행하는 비윤리적인 공장식 도축의 폐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지도 신념도 없다. 다만,


언젠가 어떤 위대한 이들이 이 체제를 무너뜨린다면, 나는 비굴하지만서도 속으로는 '그래, 이게 맞지.' 하며 순응할 것이다. (반대는 하지 않을 테니까, 동물권 운동가나 채식주의자가 계시다면 예쁘게 봐 주셨으면 한다.) 그래서 한 달에 끽해야 두 번 정도 고기를 먹더라도, 먹을 일이 있다면 내가 직접 붙들어다 죽이고 피를 뽑고 가죽을 벗겨야 한다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물론 그 전에 실험실 배양 인공고기가 하루빨리 상용화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작년인가 뉴스를 보니 한 대학실험실에서 소고기 배양에 성공했단다. 맛도 비슷했다고. 그러면, 어떤 소도 더 죽지 않아도, 최소한 덜 죽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가격만 좀 싸진다면 말이다.)


1) A4용지만한 크기의 닭장에서 평생 알이나 까다가 최후엔 잡아먹히고, 심지어 숫평아리로 태어났다면 볏도 나지 못한 채로 분쇄기에 산 채로 갈려나가는 닭들과, 2)마당에서 지네나 쌀겨를 잡아먹다 모가지가 꺾이는 닭 중에서 어떤 닭이 더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 그렇지 않은가? 결국에는 잡아먹힐 운명인데 - 적어도 전자에 비해선 후자가 그나마, 음, '나을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겠다. 내가 닭으로 태어나 봤어야 알지. 뭐, 전체적으로 보아 그나마 덜 죽고 오래 산다는 점에서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다.


6.


치킨을 먹을 때면 그 모가지 꺾인 닭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위선 떨지 말라고? 위선이라도 떨면 좀 어떤가. 닭은 그렇게 죽는다. 그렇게 털이 뽑히고 그렇게 배가 갈려서 우리 식탁에 오른다. 모른 채 먹는 것보다야 낫다.


어쨌든, 나는 닭이 좋다. 어떻게 해 먹어도 맛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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