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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Dec 10. 2018

새들이 죽어가는 세상의 끝

로맹 가리를 추모하며

언젠가 현대비평론 수업 과제로 썼던 글. 더 많은 이들이 로맹 가리를 알고 사랑하길 바라며.



인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그리고 희망


‘인간이라 - 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 더 참고 좀 더 버텨야 해.
일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 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뿐이지만 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 사샤 치포츠킨, 『달빛 산책』 중에서



1.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도 진리도, 밤하늘의 별도 사라진 시대. 버려지고 길을 잃은 인간은 하늘에 새로운 태양을 띄운다. 계몽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교화하고 나아갈 수 있다. 이성으로 우리는 이 무너진 세계에 다시금 찬란하게 빛나는 유리 궁전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계몽은 규율이 되었고, 유리궁은 감옥이 되었다. 인간이 세운 근대의 진리, 이성은 광기로, 권력으로, 폭력으로 이어졌다. 한때 유럽의 젊은이들은 폐허 위에 우뚝 선 니체의 초인을 바랐다. 독일 표현주의 시인 게오르크 하임의 시 ‘전쟁 Der Krieg’에서, 인격화된 전쟁은 파괴의 화신이요, 타락한 인간 세계에 징벌을 내리는 신적 – 악마적 존재로 묘사된다. 묵시록이 내린 뒤 우리는 다시금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 낡은 세계 위에서 다시금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의 그림의 변화에서 보이듯, 이성의 신념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봉건적 근대가 끝나고 현대가 시작된 것은, 세계가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난 뒤였다. 비로소 인간은 이성의 허위를 알아차린다. 이성의 끝에는 참호전과 아우슈비츠가 놓여 있다. 같은 종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두 유태인 작가, 제1차 대전의 루카치와 제2차 대전의 로맹 가리 또한 인간과 인간이 믿었던 세계의 총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1차 대전 전후의 사회적 타락과 몰락을 목격한 그는 저작 『소설의 이론』에서 ‘문제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지금 조각난 세계, ‘완전한 죄악의 시대’에는 총체성이 부재한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과 내 가슴속의 별이 일치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있었다. 더 이상 세계의 본질과 나의 본질은 일치하지 않는다. 개인은 분열되고 소외되었으며, 자아와 세계의 극심한 괴리와 불화 속에서 인간은 자본의 논리 속에 물건이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제1순위에 둔다. 근대적 서사시, 신이 떠난 시대의 서사시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길을 떠난다. 이는 개인의 자아 – 혹은 잃어버린 순수성 - 를 찾아 나서는 여정임과 동시에, 세계와의 화해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여정이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이 모험을 통해 루카치는 객관과 주관의 통합, 인간의 정체성, 총체성의 회복을 꿈꾸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이 여정에 있어 실천적 도구가 된다.


2차 대전에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한 로맹 가리 또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졌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인식은 회의에 가깝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언제, 어디서 오는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애초에 온 적이 있기는 한가? 한 개인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루카치와 로맹 가리는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보편성은 인간이라는 종의 총체적 ‘몰락’이다.



2.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열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장소도, 시간도, 등장인물들도 모두 다르다. 새들이 죽으러 모여드는 페루의 해변에서 코네티컷 주 이스트 햄프턴 공항까지, 좌절한 중년의 카페 주인에서 유태인 재봉사까지. 이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와 배신, 순수의 몰락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신랄한 풍자로, 반전을 가지고 그려낸다.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무렵, 뮌헨에 칼 뢰비라는 장남감 공장 사장이 살고 있었다. 인간성과 질 좋은 시가와 민주주의를 믿는 쾌활한 낙관주의자인 그는 혈통상 아리안족의 피는 별로 섞이지 않았지만 새 총통의 유태인 배척 선언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찌 됐건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어떤 생래적인 정의감과 절제와 이성이 일시적인 탈선을 바로잡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67쪽, 어떤 휴머니스트)


나치의 탄압을 피해 칼 뢰비는 충직한 하인 부부에게 그의 공장과 재산 일체를 맡긴다. 인간의 권리, 관용, 영혼의 영속성 등을 굳게 믿는 그는 양탄자 아래, 안락하게 꾸민 지하실로 들어간다. 고매한 선구자들의 귀한 책들 – 플라톤, 몽테뉴, 에라스무스, 데카르트, 하이네 등 – 에 둘러싸여 그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히틀러가 몰락하고, 하인 부부가 그를 실종처리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은 후에도, 그는 히틀러가 영국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인간성의 승리를 아직도 굳게 믿는다. ‘때때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두 부부와 인류 전체에게 품어온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이들의 얼굴을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그는 양손에 충직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죽어가리라.’


또 다른 단편,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에서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좌절된 탐구는 다시금 재현된다.


‘문명과 그 거짓된 가치와, 물질적인 부에 완전히 경도된 탐욕스러운 세상’ 모두로부터 등을 돌린 화자는 원초적 인간성과 순수를 찾아 마르키즈 제도의 한 이름 없는 작은 섬 타라토라로 향한다. 때 묻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원주민들 가운데 그는 ‘가장 소박하고 가장 감동적인 형제애와 우정’을 발견한다(발견했다고 믿는다). 마을의 통치자 오십대 여인 ‘타라통가’는 그가 꿈꿔 왔던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타락한 부와 물질에 온전히 초연한 그녀의 모습에 감동받은 화자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모아 오두막 한구석에 파묻기까지’ 한다. 하루는 그녀가 직접 구운 호두과자를 보낸다. 소박한 호두과자를 감싸고 있는 천은 의심의 여지없이,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 ‘폴 고갱’의 그림이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이토록 하찮게 여기는 모습에 그는 분노한다.


이 이름 없는 작은 섬에서 고갱의 작품을 만나다니! 타라통가는 그것으로 과자를 싸보내다니! 파리에서라면 500만 프랑은 족히 나갈 그림이 아닌가! 도대체 타라통가는 얼마나 많은 이런 그림들을 물건을 싸거나 구멍을 막는 데 써버렸을까? 인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266쪽)


물질적인 부를 뒤로 하고 온 그는 그가 마침내 순수를 찾았다고 생각한 땅에서 다시금 자본주의의 논리에 사로잡힌다. 제국주의, 문화적 우월성, 오리엔탈리즘의 사고와 같은 ‘우리네 문명의 온갖 편견들’에 번민하다가, 마침내 그는 70만 프랑이라는 헐값에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던 그림들을 사들인다.


나는 프랑스로 돌아가 화랑에 들러 내 보물들을 보여주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1억 프랑은 나갈 터였다. 내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유일한 문제는 매매가의 삼, 사십 퍼센트를 국가에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에 대한 우리네 문명의 침해가 그런 정도였다.(271쪽)


그러나 그의 기쁨을 무너뜨린 것은 프랑스행 배를 타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에서 그가 머무른 호텔의 주인이다. ‘대단한 계집이죠.’ 하고 주인은 말한다. 타라통가는 놀라운 솜씨로 고갱의 그림을 모사하며, 오스트레일리아와 정규 계약을 맺고 있다. 그녀의 고갱 모작은 하나당 2만 프랑에 팔린다.


세상은 다시 한번 나를 배신했다. 대도시에서든 태평양의 가장 작은 섬에서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계산이 인간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 순수에 대한 내 끈질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정말이지 무인도로 들어가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인가.(272쪽)


두 글에서 묘사하는 인간성 – 순수성에 대한 추구는 좌절된다. 칼 뢰비의 순진하기까지 한 믿음도, 이중성을 품고 있는 위선적인 ‘나’의 갈망은, 그것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든 이미 체화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든 박살나고 만다. 작가는 반전이라는 서사적 방법으로, 블랙 유머를 담아 이 과정을 묘사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서, 이 절망의 인식은 역사적 통찰과 맞닿게 된다. 독일 토렌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이 년을 보낸, 폴란드 출신 재봉사 쇼넨바움은 꿈꾸던 볼리비아의 수도 라 파스에 정착하게 된다. 라마 떼의 행렬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던 그의 눈길이 하루는 라마를 몰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에 가닿게 된다. 그는 수용소에서 함께 살아나온 생존자 중 한 명인 글루크만이다. 그러나 글루크만은 아직도 과거의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자네, 날 고발하진 않겠지?” 글루크만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내가 자넬 고발한다고?” 쇼넨바움이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누구한테 자넬 고발해? 왜 자넬 고발한단 말인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불안이 쇼넨바움의 목을 죄어들었고, 그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건 지구 전체를 돌연 끔찍한 위험으로 채우는 무서운 공포였다. “그건 끝난 일 아닌가!” 그가 소리쳤다. “십오 년 전에 끝났네. 끝난 일이라구!”

글루크만의 길고 앙상한 목 위로 목울대가 경련하듯 움직거렸고, 약삭빠른 이죽거림 같은 것이 그의 얼굴을 재빨리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난 그런 약속 같은 건 믿지 않아.”(280쪽)


약속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 레벤스라움의 약속,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진리에 대한, 총체성에 대한 약속. 이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다. 종속되고자 하는 ‘노예’의 근성을 타파하고 광야에 우뚝 서는 초인을 니체는 부르짖었으나, 로맹 가리가 본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쇼넨바움은 옛 친구를 거둔다. 하루하루,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여전히 믿지 않는 듯하지만, 글루크만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저녁, 그는 글루크만이 바구니에 황급히 음식을 담고 어디론가 서둘러 가는 것을 본다. 밤마실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심술궂고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다.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마침내 친구가 어디로 가는지 미행을 한다. 미행의 끝에서 그는, 글루크만을 일 년여 동안이나 끔찍하게 괴롭혔던 토렌베르크 수용소의 고문 기술자였던 나치 친위대원 슐체를 발견한다.


어떤 광기의 메커니즘이 그로 하여금 자신을 고문했던 자를 죽여버리거나 경찰에 넘기는 대신 매일 저녁 그렇게 먹을 것을 갖다 주게 했단 말인가? 쇼넨바움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은 견뎌낼 수 있는 공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289쪽)


완벽한 공포와 무의식 속에 현실감을 상실한 채,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서있는다. 정신을 차린 그는 친구를 질책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희생자의 얼굴에 떠오른 교활한 표정이 뚜렷해졌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재봉사의 머리카락을 쭈뼛 곤두서게 했고,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다음번에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네!”(290쪽)


로맹 가리가 그리는 인간은 미숙하고, 위선적이고, 나약하고, 추악하며, 타락한 존재다. 모스크바 태생의 유대인이자 프랑스인으로 전쟁에 참가한 그의 인식은 근원적으로는 그가 속해 있던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하리라. 나치와 아우슈비츠는 조직적 대량 학살이었고 인간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인간 전체를 향해 넓혀 나간다. 책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는 나치의 이야기(어떤 휴머니스트, 역사의 한 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등)는 구체적인 사례임과 동시에, 가해자 – 피해자의 구조를 넘어선 인간 전체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그가 파악한 깊은 절망의 역사는 나라와 인종은 물론이거니와 시간마저 초월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는 마침내, 애초에 인간이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기형적 존재인 난쟁이의 입을 빌려서.


사람들이라면 구역질이 나요, 선생님.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요. 그들은 속속들이 흉악해요. 흉악하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죠, 선생님, 하하! 날 웃게 내버려두세요, 좀 봤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의학의 발달에 힘입어 진정한 인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기형적인 존재들일 뿐이에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니까요.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기형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적당한 말이 없네요. (147쪽, 본능의 기쁨)


3. 그럼에도, 새들의 무덤에서 읽는 희망


“미안하다”고 그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잠시나마 믿음을 잃었는데......어찌나 두려웠던지! 최악의 일을 상상하고선...... 다시는 널 못 볼 줄 알았단다.”
분홍 비단으로 된 예쁜 리본은 풀어져 있고 화장은 뒤범벅이 된 채 립스틱이 뺨과 목 위에 번져 있었다. 스커트의 지퍼는 떨어져나가고 없었고, 그녀는 자꾸 흘러내리는 한쪽 스타킹을 어색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지, 혹시 그가 네게 나쁜 짓이라도......”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처녀가 대답했다. 남자가 기운차게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럼.”


그는 손을 들어 눈송이 하나를 잡았다.
“네가 이걸 볼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감탄을 연발했다. “이번엔 진짜 눈이란다! 내일은 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야. 모든 게 하얗고 새롭고 깨끗할 거야. 자, 가자꾸나! 거의 다 왔을 거야.” (...)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하얀 밤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지상의 주민들)


그러나 로맹 가리는 이 나약한 인간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내비쳐 보인다.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의 ‘위악적’인 태도를 읽는다. 인간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안데스 산맥 발치의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다. 늙고 지친,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인 마흔일곱의 사내는, 애써 고독과 냉소를 가장하면서도, 여전히 삶의 의미나 영혼의 존재 등을 갈망한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날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다’는 여자의 말에, 사내는 ‘잘될 거요. 두고 보시오.’라고 대답한다.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절망에서 희망을 바랄 수밖에 없다, 고 그는 이야기한다. 어찌 됐던 모든 일에는 적어도 한 가지 설명은 있기 마련이니까. 인간은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하는’ 존재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 소설집은 영악하다고 할 수 있다. 첫 작품에서 그는 희망을 추구하는 인간에 대해 묘사한다. 중간에서 그는 절망적인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묘사한다. 그러나 마지막 소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에서 그는 다시금 인간의 희망을 노래한다. 공상과학적인, 기괴하기까지 한 상상력으로 로맹 가리는 인류의 전망을 펼쳐 놓는다.


그렇다면 이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4. 『자기 앞의 생』, 상처를 보듬는 인간들


『자기 앞의 생』은 일종의 성장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랍인 꼬마 모모는 폴란드 태생 유대인, 뚱뚱한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산다. 그의 공간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의 칠층이고, 그의 삶의 지평은 노인, 고아, 창녀, 여장남자, 부랑아들과 같은 사회적 주변인들로 채워져 장소가 된다.  이 ‘기형적’이고 ‘절망적’인 인간들은 서로 상처를 나누며 대 보이고, 연대를 이룬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요.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어요. 구역질나는 그따위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308쪽)


모모가 수양엄마인 로자의 죽음 끝에서 깨달은 것은 세계의 총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한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곳은 개인이 떠나는 세계에의 여로의 끝이 아니다. 깨달음과 합일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들과의 관계와 관계의 상실 위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주의나 이론이나 목적이나 투쟁 없이도 인간은 처연하지만 아름답게 스스로를 발견한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311쪽)



5. 마치면서, 그리고 로맹 가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로맹 가리의 유서는 끝난다. 66세, 파란만장한 삶을 권총자살로 마치기까지 그는 격정의 삶을 살았다. 모스크바의 유대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자란 그는 소설가였고, 군인이었고, 외교관이었으며,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그로칼랭』,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하늘의 뿌리』 등에서 내가 읽어낸 그의 모습은 열렬한 탐구자였다. 욕망, 삶, 고독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고 갈구해 갔다. 그 자신이 밝힌 바 있듯이, ‘삶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갈망은 온갖 다양한 형태와 가능성 속에서 아무리 다른 맛을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공쿠르 상 수상자인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상의 자아를 내세워 소설을 쓴 것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탐구의 일환이었을 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을 품고 있었음에도 그는 인간을 사랑했다. 처음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서사의 전개와 문체, 문장을 떠나 그의 글은 절절히 와 닿았다. 아픔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픔을 아는 자 뿐이다. 고독을 쓸 수 있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섬세한 감정의 결을 초라하고 쓰라리게 써내려 간다. 길을 잃고 지칠 때, 쓸쓸한 그의 글은 더없이 큰 위로가 된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눈 내리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참고도서>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김남주 옮김. 파주 : 문학동네, 2007.

로맹 가리, 『하늘의 뿌리』, 김남주 옮김. 서울 : 문학과지성사, 2007.

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파주 : 문학동네, 2015.

루카치, 게오르크. 『소설의 이론』, 김경식 옮김. 서울 : 문예출판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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