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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Apr 20. 2020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서


영등포쪽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한 지 어언 6개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말썽이던 냉장고가 어느 잠 못 이루던 새벽에 장장 두 시간이나 멈춰 버려 나는 오던 잠도 몽땅 달아나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무슨 전차 굴러가는 소리를 내면서 털털거리던, 밤에 나 말고 소리를 내던 유일한 친구 - 까지는 아니고, 하여튼 사물이었던 놈이 갑자기 죽어 버렸단 말이다. 마침내 놈이 헐떡이며 숨을 들이마쉴 때 나는 모종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항상 냉장고 바꿔달라고 집주인에게 말하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어딘가 내키지 않아서 그동안 쭉 한 귀로 흘리고만 있었는데 이번 일로 집에 관련된 사안에는 무조건 부모님 말씀을 따라야겠다고 결심했다. 여튼 증상은 다음과 같았다.


1. 냉장실도 냉동실도 불이 안 들어옴

2. 냉장실에 넣어둔 야채 및 과일은 1주일도 안 돼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음

3. 김치는 푹 삭아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났고 명절에 싸온 코다리조림은 역겨운 향기를 풍기기 시작함

4. 주기적인 굉음과 침묵. 수면 패턴도 냉장고에 맞아 버려서 조용해졌을 때 얼른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맨 위에 쓴 사건이 있던 다음 날, 몇 번이고 고쳐 쓴 '사모님, 기체후일향만강하십니까' 운운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카톡을 보냈더니 웬걸, 5분도 안 되서 '네 바꿔줄게요' 하고 답이 와 허무해지더라.


그날 출근해서 전화가 왔는데 집주인 왈, '거기에 아가씨 사는 거 아녔나?' 아닌데요. 벌써 6개월째 살고 있습니다만. 여튼 바로 주문해 버렸고 물량이 밀려 다음주 초에나 온댄다. 집주인은 끝까지 '분명 젊은 아가씨였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냉장고 가격이고 나발이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했다.


오늘, 출근한 사이 비밀번호를 알려 줬더니 그새 어마어마하게 큰 놈이 와 있었다.

짠.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나오더라. 지나치게 커져서 전자렌지 문이 안 열리긴 하지만. 보잘것없나마 음료수를 사서 올라갔더니 문을 열어준 집주인, 누구냐고 묻더라. 냉장고 바꿔줘서 고맙다니까 들은 체도 음료수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이번엔 '거기 운동하는 젊은 총각 살지 않아요? 진짜 여기 살아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세상에, 집이 대체 몇 채나 있길래 세입자 얼굴도 모른담. 어쨌든 고맙단 말은 받고 내려왔다.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원래 표정이 그랬던 듯.


<깨달은 것>


- 여유는 돈에서 나온다

- 집이나 살림에 관련된 일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자

- 세입자라면 요구할 것은 재깍재깍 요구하자

- 맥주는 차가워야 더욱 맛있다


이제 다시 요리를 해야겠다. 안 그래도 쥐꼬리만한 월급인데 엥겔지수가 너무 높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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