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왓챠 WATCHA May 26. 2020

하루 세끼는 사치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4)



하루 세끼 대신 먹는 알약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고3이 되면 대개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게 된다. 스트레스로 살이 엄청 찌는 사람과 살이 빠지는 사람. 나는 살이 빠지는 쪽이었다. 최고의 다이어트라는 맘고생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그런 쪽. 


그래서 삶이 힘겨워질 땐 입맛이 뚝 떨어졌고 심지어 밥을 먹는 게 귀찮기 까지 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면 좋으련만 정확하게 하루에 세 번 배가 고프니까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게 괴로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하루 세끼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밥 때를 정확히 지킬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때를 넘겨 밥을 먹기도 하고 잠이 부족해서 밥을 포기하고 잠을 택하기도 했다.

 

마음이 힘들든 몸이 힘들든 어쨌든 내게 하루 세끼는 사치였고 지금도 그런 편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는 하루 세끼를 충실히 챙겨 먹는 이야기다. 20대의 여자 주인공은 어릴 때 살던 시골집에 혼자 살면서 열심히 하루 세끼와 간식을 해 먹는다. 일본 원작을 보기 전 한국판을 봤는데 당연히 둘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과 일본의 음식 차이 정도가 있을 뿐 영화의 주된 내용은 어차피 주인공이 혼자 열심히 밥을 해 먹는 이야기다. 


영화 원작이 ‘여름과 가을’ 편과 ‘겨울과 봄’편이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때마다 해 먹어야 하는 음식이 다른 것과도 관련이 있다. 가을에는 개암나무 열매로 누텔라 같은 초코맛 잼을 만들고 떨어진 밤을 주워 밤 조림을 한다. 여름에는 누룩으로 직접 식혜를 만들어 먹으면서 더위를 버틴다. 주인공은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는 만큼 사계절 충실하게 그때 먹을 수 있는 제철 음식을 열심히 만든다. 



따지고 보면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하루 종일 삼시세끼를 열심히 해먹기 위해 열매를 따고 집안일을 할 뿐 다른 일은 하지 않는 청년 백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 하루가 꽉 차는 건 우리 모두가 알 듯 삼시세끼를 자급자족하며 정성스레 해 먹는 것만으로 시간이 다 가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의 친구인 유타는 주인공처럼 도시에 있다가 낙향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왜 다시 농촌으로 돌아왔냐는 물음에 유타는 남이 자길 죽이는 걸 알면서도 가만두는 그런 인생을 살 수 없었다고 답했다. 도시에서의 직장생활이 자길 서서히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한 유타. 그는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게 진짜라고, 그런 어른을 존경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런 유타를 보며 주인공은 혼자 읊조린다. 자기는 유타와 달리 그냥 도망쳐왔을 뿐이라고.  


도망쳐 오면 어떤가. 이 영화 속에서 하루 하루 열심히 챙겨 먹느라 바쁜 건 유타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다.  



‘살림’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것 같다는 말들을 한다. 나도 그렇고 내 주변에서도 마음이 심란할 때 일부러 빨래를 하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나를 위한 ‘살림’을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해지면서 마음의 무언가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그런 기분. 


하루 세끼를 제대로 챙겨 먹으려면 충분한 시간과 돈 뿐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 적어도 하루 세끼를 나를 위해 준비하고 먹으려는 그런 건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게 하루 세끼는 사치지만, 언젠가 그런 사치를 부려볼 날을 꿈꾼다. 영화를 보고 괜히 나도 뭔가 해보고 싶어서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을 해봤는데 꼬박 1시간 반이 걸렸다. 뿌듯하긴 했지만 다시 또 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는 아직은 마음이 가난한가 보다. 언제쯤 마음부자가 되려나.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게 일 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 이혜성입니다'를 연출하고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곳에 상처받고 고통 받고 죽임당한 사람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