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털소녀 김붕어(2017)
반팔을 꺼내 입을 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겨털을 놔둬야 하나, 없애야 하나...
고민 없이 겨털을 없애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깔끔한 도시 여성이라면, 반팔과 민소매 사이로 삐져나오는 털들을 없애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제모의 길은 험난했다. 면도칼도 사용해보고 제모 크림도 발라보고 왁스 스트립으로 아픔을 참아가며 뜯어 보기도 했다. 털이 더 굵게 난다거나 피부가 따갑다거나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이런 방법들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돈과 시간이 쌓인 끝에 레이저 시술을 받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완벽하게 털을 없앨 수는 없었다.
털의 생명력은 엄청났다. 털의 양이 줄어들긴 했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질긴 생명력을 가진 겨털을 굳이 왜 없애야 하는 건지 의문을 갖게 됐다.
그때쯤 탕웨이가 나타났다. <색, 계>의 정사 장면에 등장한 탕웨이의 겨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성이 겨털을 자르지 않는 나라들도 있고 우리나라도 여성들이 겨털을 자르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그리고 공효진이 나타났다. <러브 픽션>에서 자르지 않은 겨털을 보고 놀란 하정우에게 공효진은 “알래스카에서는 여자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안 밀어. 겨털이 뭐가 어때서?”라고 당당히 말한다. 결국 하정우는 “내가 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모자도 털모자만 쓰고 만두도 털보 만두만 먹고 성격이 털털하단 얘기도 들어. 우리 집 티비도 디지털이야”라며 공효진의 겨털을 찬양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 속 두 여성의 등장으로 겨털을 자르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지만 몇 회의 레이저 시술 이후 겨털의 존재가 미미해졌기 때문에 나는 겨털 제모 없이 몇 해의 여름을 보냈다.
얼마 전, 왓챠 플레이에서 신작 영화 리스트를 보다가 <겨털소녀 김붕어>라는 영화를 끌리듯 클릭하게 됐다.
<겨털소녀 김붕어>는 6분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이다. 14살 소녀 김붕어가 겨드랑이에서 털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곤 계속 가위로 잘라내려 하지만 겨털은 요리조리 피하며 살아남는다. 짧은 애니메이션이니만큼 겨털이 생명체라는 설정이나 결말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귀여운 그림체와 ‘겨털’이라는 흥미로운 주제 때문에 유쾌하게 봤다. 이 영화는 여자의 겨털이 꼭 숨기고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귀엽고 친근하고 쓸모있는 존재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꾼다.
어쩌면 점점 여자의 겨털에 대해 사회가 좀 더 너그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겨털을 고의로 자르지 않은 여성을 마주치지 못했다. 요즘엔 겨털 숱 정리 정도는 하는 남자들도 등장한 것 같긴 하지만 대부분이 겨털을 밀지 않고 다닌다. 남자의 겨털은 여자의 겨털만큼 금기시되진 않는다.
김붕어의 겨털 만큼이나 생명력이 대단한 나의 겨털도 슬슬 또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도 또 고민이 시작됐다. 이 여름을 과연 겨털과 함께 보낼 것인가.
겨털소녀 김붕어,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게 일 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을 연출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