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틸란드시아를 보며

너와 나의 삶을 생각한다

by 물지우개

우리 집 식탁 등에 수염틸란드시아가 매달려있다. 재래시장에 갔을 때 트럭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들 중 제일 풍성한 아이를 만원을 주고 데려왔다. 매달아 두기만 하면 미세먼지를 빨아들인다는 주인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샀다. 미세먼지 제거를 어찌 증명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는 식물을 만나면 경제성이 급속히 떨어진다. 반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뿌리의 생존 모습이었다. 물이나 흙에 의존하지 않는다. 중력과도 무관하게 공중에 매달려 바람을 맞는다. 초록빛을 띠니 광합성도 하리라. 뿌리라는 본분을 잊고 잎을 코스프레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분명 너도 처절한 번식을 위한 잎과 꽃, 열매가 있을 텐데 뿌리라는 본분을 잊으면 어떻게 되는 거니?

검색해보니 뿌리지만 뿌리가 아니었다. 나무에 착생하는 완전 기생 식물이었다. 내가 매달아 놓은 부분은 퇴화된 뿌리이자 잎과 줄기였다. 식물이 저마다 주어진 환경에 최적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하지만 이 식물은 어쩌다 이런 민폐(?)로 전락했는지. 뿌리지만 실은 잎과 줄기고, 잎과 줄기지만 뿌리처럼 습기와 양분을 빨아들여 살아가는 기이한 모습이다. 꽃을 피우지만 퇴화된 듯 화려하지 않고 번식도 큰 나무에 붙어 기생에 의존할 뿐. 이러니 잎이나 꽃을 보는 쓰임새가 아니라 푹신푹신한 탄력성으로 충전재로 쓰인단다. 사람에게 먹히는 쓰임보다 더 굴욕적이다.


굴욕적인 용도 덕분에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동양의 작은 나라, 어느 집에 식탁 등까지 갈 수 있었을까. 여기서는 나무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사람이 알아서 잘라서 번식시켜준다. 공기 중의 수분으로 살아갈 뿐인데 인간을 이롭게 한다. 이기적인 잎과 줄기에 인간이 기꺼이 반해주니 몸값이 오른 사실보다 더 행복할지도.

그래도 페루의 어느 큰 나무에 기생하는 삶이 더 나을까. 같은 처지의 벗과 소통하고, 민폐에서 벗어나고자 진화를 꿈꾸고, 연대할 수 있는 자유가 그리울까. 뜯겨나가는 생의 말미에 충전재로 말라비틀어져도, 지구 반대편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꿈을 꾸는 그곳이 나을까.

수염틸란드시아를 보며 나는 사람을 본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평범한 생은 얼마나 기이하게 진화하는지, 뿌리가 퇴화해 잎과 줄기가 된 듯 학교는 돈벌이의 척도이자 수단이다. 배움, 그 자체가 좋아서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중·고등학교는 성적비관으로 얼룩져있고, 대학교는 취업을 위한 과정일 뿐 4년은 채찍질하는 시간이었다. 큰 나무에 기생하듯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에 의지하고 부모는 당연한 듯 자식을 돌본다. 기생해도, 아니 기생으로 삼포(연애, 결혼, 출산)가 만연하니 학교에서 말도 안 되는 저출산·고령화 교육을 한다. 배움으로 경쟁하고 서열화한다.

수염틸란드시아는 언제까지 민폐 캐릭터로 기생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충전재로 뜯겨 나가기 위함도 아니다. 먼 나라로 팔려나가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래도 수염틸란드시아는 아름답다. 자신의 본성을 지키며 죽지 않고 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페루의 큰 나무에 붙어도, 포장의 속을 채우거나 지구 반 바퀴 돌아 어느 집에 매달려도 주어진 삶을 평범하고 숭고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니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우리의 젊은 시절은 결코 굴욕을 향해 견디지 않았다. 수염틸란드시아처럼 지금 삶에 만족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반할 만큼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말이다. 신이 만든 사람 자체가 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타인과 어울려 선한 연대를 만들고 더 나은 삶을 꿈꾸니 어느 노래 가사처럼 충분히 “꽃보다 아름답다.”


수염틸란드시아를 보며 내 모습의 어느 부분이 기이한지 반성한다. 나은 돈벌이의 수단으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했다. 사람의 일부만 보고 마음을 닫았다. 부모와 배우자를 비교했고 원망했다. 내 직업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책을 의심할 뿐 이해의 노력 없이 덮었다. 나와 타인의 꿈을 쉽게 비난했다. 생각하면 수두룩하다. 수염틸란드시아보다 더했음 더했지 덜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뿌리고 줄기고 잎이고 본문마저 다 내쳤을 때가 많았다. 민망하지만 나는 몇 번 우울했고, 죽고 싶었다.




우리 집 수염틸란드시아가 시름시름 앓으며 삶을 포기하려 한다면 나는 페루로 날아가 고향나무에 다시 붙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생을 유지해야 하는 당위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페루는 너무 멀다. 한번 가보고 싶기는 하지만.
비행기 값도, 시간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나는 무조건 너를 돌보고 번식시켜야겠다.
너의 생존이 나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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