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값 하고 있나요

제대로 늙으려고 노력중

by 물지우개
나이 든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잇값에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제대로 늙고 있는지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다.


나는 새치염색을 한다. 삼십 대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빠를 봐도 절반의 원인은 유전자다. 그래도 내 흰머리의 발생 시기와 속도는 평균보다 빨랐다. 간격이 점점 짧아져 처음에는 일 년에 한 번, 육 개월에 한 번, 4개월에 한 번씩 뿌리 염색을 했다. 지금은 두 달에 한 번씩 하는데 3년 안으로 한 달에 한 번이 될 것 같다. 4개월에 한 번씩 할 때까지는 미용실에 가서 염색했다.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피부, 손톱을 만지는 서비스는 돈을 지불하는 많은 서비스 중에 특히 존중을 사는 서비스다. (이 서비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결과보다 과정이다. 존중받으려면 존중해야 한다는 진리처럼 소비자도 돈과 존중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 두 달에 한 번씩 염색이 필요한 지경이 되자 내 머리카락을 서비스 시장에 내놓기가 불편해졌다. 시간과 돈도 부담스럽지만 나이에 비해 머리카락의 빠른 노화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흰 머리카락이 당당한 어른을 우러러본다. 흰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일은 늙음에 대한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나잇값을 한다는 당당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내 머리카락은 노화하고 있지만 나는 나잇값에 당당하지 않다. 무조건 감춰야 한다. 마흔에 흰머리를 내놓는 적절한 나잇값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나는 확실히 아니다. 그래서 염색을 해야 한다. 그릇이 안 되는데 자꾸 흰머리가 나니 민망하다. 존중의 서비스를 받으러 가기도 부끄럽다. 직접 처리할 수밖에 없다.

셀프염색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유튜브를 찾았다. 5번 반복하고 나서야 감을 잡았다. 할 때마다 시간이 단축되고 효과도 좋았다. 달인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나아졌다. 새치염색을 할 때 나는 제대로 늙어 가고 있는지 반성한다. 나는 나잇값을 못해 흰머리를 감추는 신체적 거짓을 자행한다.





티브이에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보았다. 나는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풍의 멜로디와 리듬은 내 취향이 아니다. 꺾기나 바이브레이션은 감정이 넘친다. 가사도 마찬가지. 어느 하나 담백하지 않으니 트로트는 나에게 과한 음악이었다. 그런데 채널을 돌리다 트로트에 멈췄다. 어느새 나는 집중하고 있다. 비난했던 꺾기와 종잡을 수 없는 바이브레이션에 마음이 따라가고 있다. 가만히 가사를 곱씹고 있다. 이전의 트로트는 전국 노래자랑이나 가요무대에 나오는 음악이었다. 주된 관객이나 시청자는 적어도 50대 이상이다. 화면상의 그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손뼉을 친다. 흥에 못 이기면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앞에 나와 춤을 춘다. 나는 ‘트로트는 노인 취향이구나.’ 했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트로트를 듣거나 부르는 일은 없을 거라 다짐했다. 큰 오산이었다.

20대 초반의 여성 가수가 부르는 ‘새벽 비’나 남자 고등학생이 부르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충격적이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가사가 들리고 멜로디가 어울렸다. 가수가 뽐내는 가창의 기교는 노래에 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름다웠다. 30대로 보이는 어느 가수가 주현미의 ‘아버지’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눈물이 났다. 종잡을 수 없는 꺾기가 눈물처럼 감정을 타고 흘렀다. 올드한 바이브레이션은 꾹꾹 억눌렀던 父情을 뒤흔들었다. 내가 어릴 때 유명했던 트로트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나는 프로듀스 101이나 슈퍼스타 K를 열혈 시청하는 사람이다. ‘쇼미 더 머니’까지는 아니지만 딸 덕분에 따라 부를 수 있는 걸그룹의 노래가 많다. 멤버 이름은 다 몰라도 그룹 이름과 제목도 안다. 그런 내가 트로트에 울고 있다. 지나가는 아들이 “엄마 울어?”라고 물어도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얼른 티브이를 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나이가 들었다.

이러다 언젠가 내가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면 트로트를 고를 수도 있겠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나잇값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트로트를 자신 있게 부를 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는지. 트로트 가사와 멜로디, 기교에 반할 만큼 내 감정이 무르익었는지 반성한다. 노화가 진행 중인 나의 대중가요 감성에 진심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늙고 있는지 생각한다. (그나저나 트로트를 부르는 저 어린 가수들은 아무래도 천재인가 보다.)



생일 케이크를 사는 이유는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빵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케이크는 가성비가 떨어진다. 케이크를 먹으려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일 케이크의 구입 목적은 바로 촛불을 불기 위해서다. 나이만큼 초를 꽂아 불을 붙이고 불꽃을 보며 소원을 빌기 위해서다. 불을 끄고 축하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다. 내 생일날, 초를 꽂는 순간이 왔다. 나는 언제부터 초의 개수가 내 나이와 똑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이가 많으니 초를 꽂는 시간도, 불을 붙이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특히 일의 자리 숫자가 클 때는 여간 민망하지 않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생신 날 “초는 하나만 꽂아라!”라고 하실 때 이상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다. “그냥 하나만 꽂아.”

둘째가 그건 틀렸다고 초를 정확하게 꽂으니 나는 한숨이 난다. 또 그놈의 나잇값이 떠오른다. 불꽃 여러 개가 동시에 이글거리며 나를 째려본다. 초는 제 몸의 희생이 정당할 만큼 날더러 떳떳하게 늙고 있는지 묻고 있다. 나는 서둘러 불을 꺼 버린다. 초가 아깝다.

신체는 불혹(不惑)인데 나는 매일 혹한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새치염색을 하고, 몰래 트로트를 듣고, 초도 하나만 꽂는다. 나는 나잇값을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 얼마나 한심해했던가. ‘저렇게는 늙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나는 ‘나이 사깃꾼’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지 겁이 난다.


돋보기를 끼고 바느질을 하는 나를 상상한다.
나는 트로트를 틀고 흥얼거린다. 머리는 백발에 쪽 졌다. 손자들이 케이크를 들고 오면 나는 묻는다.

“니들, 초 제대로 꽂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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