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부산역에서 나는 노숙자를 찾고 있다

부산의 온기를 느끼던

by 물지우개

월요일 오전 열 시,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아이들과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같은 이름의 지하철역으로 발을 옮겼다. 지하철과 열차의 교차지점인 그곳에는 가벼운 부산 내 이동민보다 무거운 캐리어의 지역 이동민이 많았다. 우리는 후자였지만 가벼웠기에 무겁지 않게 주변을 볼 여유가 있었다. 그러다 마주한 무거운 장면-우리 셋의 눈은 노숙자에 멈췄다.

저마다 탈 것을 향하는 발소리로 꽉 찬 곳, 공평한 시간도 1.5배 빨리 흘러가는 곳에 정지화면처럼 멈춘 사람이 있었다. 남자는 펼친 박스를 깔고 누워 있었다. 팔짱을 꼈고 다리는 포개 살짝 구부렸다. 옷은 더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끔하지 않았다(지금 내 옷도 그렇다). 정말 잠이 들었는지 잠든 채를 하는지 몰라도 눈을 감았고 표정은 없었다. 정지화면을 본 아들이 잡고 있던 내 손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사실 그전부터 나는 멈춰있었다.



“저 아저씨 여기서 자는 거야? 집이 없어서?”

“집이 없는 게 아니라 망했겠지.”

“망하면 길에서 자야 돼?”

“집에 못 들어가니까 그렇겠지.”

“누나가 틀렸어. 집이 없는 거야. 아무리 망해도 집이 있으면 집에서 자지, 왜 창피하게 길에서 자겠어?”

“집에 못 가는 이유가 있겠지.”

“근데 왜 하필 사람 많은 지하철역이야?”

“화장실도 있고 비도 안 맞고 에어컨도 나오잖아.”

“그런데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다른 데는 쫓아내잖아. 지하철역은 쫓아내는 사람이 없잖아.”

“그런데 이렇게 많이 쳐다보는데 잠이 올까?”

“많이 쳐다보니까 자야지.”

“저 아저씨 보니까 그때 엄청 흔들리던 배에서 코 골던 아저씨 생각난다.”



아이들은 노숙자를 보더니 스스로 소설을 썼다. 아이들의 소설은 장면의 전환으로 끝났지만 지루한 내 성격처럼 나는 소설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소설의 잔향은 짧은 여행을 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아이들에게 부산타워를 보여주기 위해 용두산공원에 갔다. 이곳은 서울의 탑골공원처럼 노숙하는 비둘기와 심심한 할아버지들이 주연이던 장소다. 누가 이 둘을 쫓아냈을까? 비둘기도,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과 대형 커피점, 두 곳 소속으로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 여러 개가 주인공이었다. 모두 돈이 필요한 곳이다. 비둘기와 할아버지가 돈을 내면 앉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돈인데.


용두산타워는 매표소부터 달라졌다. 원래도 입장료가 있었지만 이렇게 비싸지 않았고, 유니폼을 입은 직원도 많지 않았다. 직원은 어리거나 젊었고 서울말을 썼다. 서울의 롯데타워, 오사카의 스카이빌딩, 타이베이 101처럼 입구에서는 요청한 적 없는 우리를 모델로 사진을 찍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최고 화질의 빛나는 영상으로 내가 아는 부산을 촌스럽게 만들었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본 것은 강제로 찍힌 우리들의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 값에 놀랐고 주인마저 거부한 우리 사진 파일은 오늘 휴지통에 버려질까 내일 버려질까 궁금했다. 드디어 보이는 권력자 눈높이의 부산보다 먼저 다가와 기습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은 기프트샵이었다. 아이들은 풍경의 감탄과 궁금증보다 선물가게를 향한 환호와 호기심이 컸다. 상품마다 네모난 가격표는 빠지지 않았다. 그나마 겨우 권력자의 눈이 돼 보려 해도 망원경은 오백 원을 요구했다. 젊은 직원은 어린 직원에게 서울말로 가르쳤다. “여기는 황령산, 저기는 천마산, 저쪽은 영도, 이쪽이 송도예요, 저 다리가 남항대교, 이 다리는 북항대교죠. 케이블카를 타는 곳은 저쪽이고 오륙도, 광안리, 해운대는 반대쪽이에요.” 나는 부산말로 오륙도와 광안리와 해운대를 더 정확히 알려주려다가 못 알아들을까 봐 그만뒀다. 부산타워는 부산사람이 오는지 궁금했다. 오사카에서 관광명소라는 스카이빌딩을 찾으려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아무리 물어도 고개를 갸우뚱하던 것처럼.


보수동 책방골목에 갔다. 탑을 쌓은 책들은 사랑을 기다리지도 관심을 끌고 싶지도 않은 듯 무심했다. 관록 있는 책일수록 더 시니컬했다. 책방 주인도 마찬가지. 디지털 자료도 없으면서 돼지털만큼 많은 책을 어찌 다 파악하는지 내가 묻는 책마다 없다고 했다. 나는 주인에게 내가 원하는 책이 없다는 전산 증거를 대보라고 할 뻔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책방과 책방 골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뿐 책을 사지 않았다. 다행히 팔러 오는 사람도 없어 이 책방골목은 일정한 밀도의 책 냄새를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 때 맡던 책방골목 냄새는 여전한데 부산사람은 주인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곳의 냉소를 이해할 것 같았다. 나도 서울에 가면 큰소리로 부산말로 떠들기 때문이다(나에게 서울말은 이상하게 권력적이나 자격지심은 아니고 말하고 싶다). 아이들은 다행히 원하는 책을 찾아내 냉소적인 책에 사랑을 주었다. 잠깐 부러웠다.




다시 지하철 부산역이다. 나는 그 사람을 찾고 있다.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아도 마음이 급했다. 찾는 동안 생각했다. 부산사람일까? 부산말을 쓸까? 혹시 보수동 책방골목 책 냄새를 알까? 용두산타워, 아니 부산타워의 변신을 지켜봤을까? 노숙하는 비둘기에게 새우깡을 줬을까, 감자깡을 줬을까. 장기 두던 할아버지 옆에서 구경은 했을까? 시간 많은 할아버지 만나 좋다며 담배 한 개비 권했을까?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워 눈을 감고 부산의 온기를 느끼던 노숙자는 가고 없었다. 부산역 마저 곁을 내주지 않아 갔는지, 더 따뜻한 곳이 생각났는지, 퇴근시간이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노숙자 흉내를 내며 잠이 들었다. 서울행 기차 시트에서는 아직도 부산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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