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만큼 화낼 수 없을까

나와 아이가 반듯해질 정도만

by 물지우개

오랜만에 옷장을 정리했다. 덥다는 핑계로 다림질을 미뤘던 옷을 몽땅 꺼냈다.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은 덕분에 우리 집 다리미는 아직도 혼수로 산 다리미다. 작년부터 재봉틀로 옷을 만들었고, 옷감으로 리넨을 많이 다루다 보니 다림질이 필요한 옷은 대부분 내가 만든 옷이다. 다리미 선을 꽂고 다리미 판을 폈다. 온도를 올리고 물뿌리개도 준비했다.

쭈글거리는 리넨에 물을 뿌리면 옷감이 뻣뻣해진다. 구김이 있는 부분에 손바닥으로 한번 눌러 다리미가 올 자리를 눈으로 견주고는 이내 뜨거운 열을 갖다 댄다. 칙—하며 물기와 열판이 만나는 소리가 들리면 다리미는 왔다 갔다 움직인다. 제맘대로 꼬인 씨실과 날실은 뜨겁고 납작한 열에 증기마저 더하자 바로 순해진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아이를 키울 때 매를 드는 순간이 있다(딸보다 아들이 많았다). 체벌만큼 비교육적인 교육이 없다지만, 나는 회초리로 아이를 때렸다. 설명하고, 윽박지르고, 협박해도 아이가 고집을 부리거나 행동에 변화가 없으면 나는 인내심 고갈과 동시에 폭발했다. 주로 효자손이나 파리채를 잡았는데 그걸 잡는 순간에 이성은 없었다. 아이를 때려야 한다는 분노뿐. 매를 보고 겁을 먹은 아이가 아예 드러누워 큰 소리로 우면 나는 힘껏 다리나 엉덩이를 때렸다. 협박의 마지막 단계는 “회초리 든다!”였다.

자식을 내 소유물인 냥 나는 마음껏 분노하고 폭발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내 자식도 아닐뿐더러 절대 그래서도 안되고,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가르치다 보면 인내심 고갈-분노-폭발의 예감이 들 때가 있다. 미안하지만 그럴 때는 그 아이를 눈에 담지 않는다. 봐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화났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말없이 가만히 서 있거나 내 자리에 앉아 기다린다. 내 자식과 고객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폭발하거나 냉정해진다. 둘 다 옳지 않다.

내 자식도 나에게 온 고객이고, 우리 반 아이들도 학교에서 내가 키우는 자식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두 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화를 내지 않을 재간이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태평양처럼 허용할 수도 없다. 아이들도 이런 나에게 화나는 것이 당연하다. 비폭력 교육을 실천하는 어느 선생님의 연수에서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선생님은 집이나 교실에서 화가 날 때 어떻게 하세요?”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거짓말같이 비현실적인 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화나지 않을 수가 있지?’

다시, 다리미로 돌아가서 다림질한 옷이 반듯해졌다. 쭈글거리거나 구겨진 옷은 맵시가 나지 않는다. 깨끗해도 지저분해 보인다. 반대로 옷을 다림질해서 입으면 헌 옷도 새 옷처럼 맵시가 난다. 단정하고 깔끔하니 예의까지 있어 보인다. 최초의 옷감-씨실과 날실이 교차해 능직이나 평직인 상태는 분명 구김 없이 반듯했다. 자르고 꿰매고 세탁하고 입고 다시 세탁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 옷감은 후줄근해지고 구겨진다. 옷감의 본성을 찾는 과정- 다림질은 옷감에게 뜨겁더라도 필요하다.

딱 다림질만큼 화낼 수 없을까. 아이의 본성을 찾을 수 있을 정도만 뜨거워질 수는 없을까. 옷감의 종류에 따라 적정온도가 있듯 아이의 성품에 따라 온도를 조절할 수 없을까. 적정온도에 도달하면 바이메탈의 열팽창 계수가 낮은 금속 쪽으로 구부러지듯 즉시 냉각할 수 없을까. 옷감에 물을 뿌리듯 아이와 내가 문제 상황에서 침착해지고, 손바닥으로 눌러 다림질할 자리를 견주듯 아이와 내가 이해할 시간을 가지고 싶다. 열판이 옷감에 닿듯 엄마나 선생님도 너에게 서운하고 화가 난다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다. 칙-소리가 나며 물기와 열판이 만나듯 나도 아이의 기분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싶다. 다리미가 옷감을 왔다 갔다 하듯 충분한 논쟁으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싶다. 아이의 상황과 나의 상황, 아이의 바람과 나의 바람으로 여러 번 전, 후진하고 싶다. 다림질이 끝나기 전에 코드를 뽑아도 여열이 있어 손수건을 다릴 수 있듯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아이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다. 그러나 다리미는 화상을 입을 수 있고, 옷감이 눌어붙어 구멍이 나기도 해서 항상 조심해야 하듯 아이의 생각이나 행동을 교정하는 모든 과정에서 엄마 혹은 교사는 신중하게 고민하고 조심, 또 조심해야 하겠지.




어떤 옷은 널 때와 갤 때 충분히 터는 것만으로 반듯해지니 다림질이 필요 없다. 편하게 입는 대부분의 옷은 솔직히 다림질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아이도 엄마나 교사가 화낼 필요가 없다. 어쩌면 화가 나지 않는다는 그 선생님 말은 거짓이 아닐 수 있다. 아이는 엄마나 선생님이 행복할 때 자신도 행복해지니까. 대부분 아이는 문제 상황에서도 엄마나 선생님을 행복하게 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많다. 다만 내가 만든 옷이 다림질이 필요하듯 어떤 이유로 더 마음이 쓰이거나 관심이 가는 아이(내 자식은 물론이다)는 다림질 같은 특별한 손길이 필요하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화가 나고, 내고 싶다. 아이의 본성, 구김 없고 반듯한 모습을 찾아주고 싶다.

내 분노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화’의 다른 면에 기대나 애정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나와 아이가 반듯해질 정도로만 그 어떤 부작용도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 생각해보니 화 내기가 더 어렵다. 화가 나지 않는다는 선생님께 살짝 화가 난다. 아무래도 찾아가 그 방법을 따져 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