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엄마 아빠가 싸웠나요? 둘이서 소리를 지르던가요? 혹시 물건이 날아다니고, 부서졌나요? 이웃집에서 항의는 들어오지 않았나요? 누군가 울었나요? 술을 마셨나요? 혹시 때렸나요? 폭력을 목격한 당신은 경찰에 신고했나요?
당신은 을이죠. 지금은 갑이지만 나도 을이었어요. 우리 모두는 을이었어요. 을은 갑이 만들었고 한동안 갑의 소유물이죠. 갑이 키우다가 버리기도 하니까요. 싸우는 갑들을 지켜보는 을은 불안해요. 종속 변인이니까요. 갑의 불행은 을의 소멸을 암시하니까요. 알아요. 당신은 어젯밤 무척 무섭고 불안했을 거예요.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갑이 싸우는 소리는 고막에 도착했어요. 공포로 소름이 돋고 더워도 추웠을 거예요. 불안과 공포의 바다를 건너느라 잠도 설쳤겠군요. 긴 밤 수고 많았어요.
지금 학교인가요? 수업 중인가요? 아침은 걸렀겠지만 평소처럼 등교한 당신을 칭찬해요. 공부는 잘 안된다고요? 괜찮아요. 하루 공부 안 해도 별일 없어요. 오늘은 공부 말고 갑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해봐요. 을의 옷을 벗지는 못하더라도 벗는 상상이라도 해보자고요. 할 수 있어요. 사실 처음부터 당신은 을이 아니니까요.
엄마 아빠의 싸움, 그 끝을 당신은 알아요. 이혼이죠. 아,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둘의 싸움을 보고 있으면 결국 그 끝을 볼까 봐 당신은 무서웠을 거예요. 이혼은 곧 나의 소멸을 뜻하니까요. 원해서 태어난 삶도 아닌데 내 삶을 책임지지 않는 저들이 미울 거예요. 나도 그랬어요. 싸우는 그들을 증오했어요.
그들이 싸우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 내가 공포와 원망의 눈물을 흘려도 그들의 싸움을 멈추지 않더군요. 오히려 나를 보는 그들의 눈빛-적의 씨앗이었던가, 당신 고통의 출발이었나, 도망치지도 못하는 올가미였던가-은 내 눈물을 허무하게 만들었어요. 그들이 나보다 더 공포와 원망으로 질려있었거든요. 아, 경멸도 섞여있었어요.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태어난 부산물을 보는 눈이었죠. 나는 엄마 아빠를 반씩 닮았으니까요.
나는 그대로 깨진 그릇처럼 부서지고 싶었어요. 엎질러진 국이 말라붙는 것처럼 증발하고 싶었어요. 당신도 그랬나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분노했나요? 그들보다 더 큰 괴성을 지르며 집을 나왔나요? 잘했어요.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밟은 자들에게 지렁이의 꿈틀거림을 보여주지 못한 나는 이제야 아쉽군요.
자,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2라운드가 펼쳐질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집에 들어가지 말까요?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일단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요.
지금은 갑이라고 내가 말했던가요? 나는 부모를 보며 결혼에 환멸에 느끼기도 했지만 결혼을 했어요. 자식도 있고 당연히 부부싸움도 해요. 자, 벌써 증명하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 말이에요. 완전, 완벽한 인간이 존재할까요? 실수하지 않는 사람 있을까요? 실수하니까 사람이죠, 부족하니까 종교가 있겠죠. 완전한 신이 당신을 만들었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났잖아요. 물론 당신도 그런 인간이고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부모도 그렇고, 당신의 엄마 아빠는 불완전한 티를 많이 내는 사람일 뿐이에요. 지금의 나도, 미래의 당신도 그럴 가능성 많고요. 일단 이것부터 우리 인정해요. 이제 내가 다음 할 말 예상하나요? 맞아요. 식상하다 해도 달리 말할 방법이 없네요. 인간은 싸워요. 무조건 싸워요. 신이 아니니까요.(하늘나라에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신도 싸우지 않을까요?)
싸움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소리 좀 지르고 물건 몇 개 부서져도 괜찮아요. 필요하면 부모가 알아서 고치고 못 고치면 새로 살 거예요. 이웃에 피해를 줘서 창피하다고요? 못 참는 이웃이 알아서 신고할 거예요. 의외로 신고 안 하고 집중하는 이웃도 있을걸요? 그들은 싸움 소리를 들으며 영화보다 흥미진진해하고 예능보다 더 웃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그들에게 관람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부모가 육탄전을 벌이면 어쩌냐고요? 112로 신고하세요. 경찰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오늘도 출근했어요. 가정폭력을 집안일로 덮는 시대가 아니에요. 만약 아직도 그런 경찰이 있다면 인터넷에 글 올리세요. 오늘날의 댓글부대는 경찰을 이기기도 해요.
당신이 소멸할까 봐 겁이 나나요? 둘이 이혼하면 결손가정의 불쌍한 자식이 될까 봐 걱정되나요? 왜 스스로 ‘불쌍’을 자초하나요?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숨길 것도 아니지 않나요? 그게 뭐 어때서요? 당신이 부모더러 싸우다가 이혼하라고 시키지도 않았잖아요. 왜 당신이 불쌍해지나요? 당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싫다고요? 연민의 시선이 아닐 수 있지만 정말 부모의 이혼으로 당신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면 그 사람, 버리세요. 인연을 이어갈 가치가 없어요.
오늘 밤 2라운드가 펼쳐질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들어갈까 말까 집 앞에서 고민하지 마세요. 어제보다 더한 싸움을 상상하지 마세요. 당연하게, 당당하게 집에 가세요. 책가방을 갖다 놓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밥을 차려주면 배부르게 먹고 안 차려주면 찾아서 먹으세요.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면 좋아하는 추리 소설을 읽기 좋을 거예요. 2라운드 싸움의 예고편이 펼쳐지면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봐도 좋아요. 시끄러우면 볼륨을 올리고 도저히 못 참겠으면 그냥 나와서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가세요. 놀이터도 좋고 버스정류장도 괜찮아요. 움직이는 사물에 몸을 실어 바람을 느껴도 좋고 그냥 쳐다보며 스토리를 만들어도 좋아요(사실 그럴 때 진짜 예술이 나와요). 피할 틈도 없이 눈앞에서 엄마 아빠의 싸움을 본다면 그들을 말리지 마세요. 끼어들지 마세요. 공포와 원망의 눈빛도 보내지 마세요. 우는 사람을 위로하지 마세요. 그 슬픔에 공감하지 마세요. 불완전한 인간들의 싸움을 이웃처럼 구경하세요. 상대가 논리적일 때마다 +1점을 주거나 논리 없이 흥분하는 상대에게 –1점을 주는 방법도 괜찮아요. 승자를 예상하고 배팅한 다음 점수를 매기면 그 시간은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즐기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불완전한 부모를 줬다고 신을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은 결혼하지 않겠다거나 결혼하더라도 자식 앞에서 싸우지 않을 자신, 있나요? 인간은 그렇다니까요. 당신은 갑이 아니지만 을도 아니에요.
부모가 싸워도 괜찮고, 이혼해도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당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큰 일 아니에요. 당신은 부모와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에요. 별개 인간들의 싸움으로 당신이 불행해질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그때 많이 울고 많이 무서웠어요. 걱정하고 슬펐어요. 집 앞에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몰라요. 부끄럽지만 지금도 큰 소리가 나면 두근거리는 심장이 뒤통수를 때리는 지진을 느껴요. 그때 누군가가 나처럼 이야기해 줬다면 이런 고통도 없을 텐데 말이에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꽃이 폈다 지는 것처럼, 태어나면 죽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누구나 같은 양의 고통을 안고 산다는 ‘고통 총량의 법칙’처럼 부부싸움은 고통의 하나일 뿐이에요. 부모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에 얹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만들 권리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