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를 앞두고
교육부에서 등교 일정을 발표했다. 내가 담임하는 1학년은 등교일이 5월 20일로 초등학교에서 가장 빠르다. 아이들이 곧 등교한다고 생각하니 며칠 안 남은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는 마음이 또 다르다. 반드시 넣어야 하는 숙제 같은 농구공이 수북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수북하던 동그란 초콜릿을 어느새 다 먹어버린 느낌이다. 시작할 때와 또 다르게 떨리고 두렵다.
모두 다른 색을 가진 어린이가 교실에 모이면 또 다른 색을 가진 나는 과연 어떤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내 수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 달 넘게 텔레비전 화면 속 선생님과 수업하다 현실교사를 만나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과연 배움이 있을까. 태어나서 학교에 처음 오는 아이들만큼 나는 무섭다.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을 때는 안 해도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주어진 모든 일이 하기 싫었다. 주간 학습 안내를 만드는 일부터 영상을 만드는 일, 처음 보는 온라인 수업 플랫폼에 반을 만들어 수업자료를 올리는 일, 가정으로 보내는 학습지를 제작하는 일 등 쉽지 않았고 해결 속도도 느려 답답했다. 내가 유튜버도 아닌데 영상 속에 내 목소리나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다른 학년이나 다른 반과 비교가 되어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다. 모니터를 하도 들여다봐서인지 눈이 뻑뻑하고 두통이 와서 결국 눈을 보호한다는 안경도 샀다. 웹캠이라는 신문물과 처음 경험하는 애플리케이션으로 하루하루가 넘어야 하는 산이었지만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처음보다 온라인 수업의 질은 분명 점점 나아졌고, 내 업의 저울 속 바늘도 힘듦에서 즐김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이렇게 가다 보면 정말 교사가 필요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미래에는 교사라는 직업은 없어지지 않겠다 싶었다. 배움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자기 색을 더 쳐다보고 다른 색과 잘 섞이는 법을 아는 과정이 아닐까. 교사도 교실 속 아이와 같다. 나이가 좀 많을 뿐이지 자기 색이 있고 다른 색과 섞여야 한다. 영상 속에서 보이는 사람은 온전하지 않다. 약 한 달간 온라인 수업은 대면 수업 2~3일과 같은 배움이랄까.
다채로운 색을 인정하는 눈을 가진 교사가 되려면 청광안경 따위는 필요 없겠지. 나는 다시 내 업의 본질을 떠올리고 기억해야 한다. 어제 돌봄 교사를 대신해서 1학년 어린이 5명을 데리고 잠깐 수업을 했다. 고작 5명인데도 나와 잘 섞이는 어린이가 3명, 방법이 안 보이는 어린이가 2명이었다. 나는 잠시 가슴이 답답했다. 불통(不通)의 원인과 결과가 바늘을 들고 머리를 쑤시는 느낌이었다.
업의 본질, 나는 사람에게 사람으로 성큼 다가가면 된다. 아프다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주고 웃으면 나도 같이 웃자 하면 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영상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선생님의 온기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지겨운 밥벌이는 맞지만 내 손을 물끄러미 보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거는 일은 결코 지긋지긋하지 않다. 나 또한 아이의 온기가 필요하니까. 조그만 어깨지만 나도 기대고 싶으니까. 이 업은 분명 나도 살고 아이도 사는 업이다.
처음 만날 아이의 빛깔을 떠올리니 설렌다. 나는 아름다움에 약하다. 아이의 빛깔에 비추면 나는 어떤 색이 될지 기대된다. 자주 머리가 쑤셔도 각자의 아름다운 색으로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라면 그리 아프지 않겠지?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목숨 걸고 병과 싸운 의사 '리외'는 의외로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나는 위대한 스승이 아니다. 내 업을 보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된다. 업의 본질, 그 최전선만 지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