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분석을 가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말로써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앨버트 슈바이처
나는 일주일째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만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 곡은 바흐 대위법의 정점에 있는 곡이다. 나는 어떤 때는 제1바이올린에 따르다가, 또 어느 날에는 보일 듯 말 듯 도망치는 2 바이올린을 힘껏 쫓아가기도 한다. 두 바이올린은 결코 만나면 안 되는 듯 냉정한 평행을 유지한다. 두 바이올린은 달리면서 서로에게 외친다. ‘네가 나고, 나는 너지만 같이 있으면 안 돼! 같은 걸 들켜서는 안 된다고!’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가끔 힘이 빠진다. 마음을 거스르는 일이 어디 쉬우랴.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안다. 보고 싶은 마음, 부둥켜안고 만지고 싶은 마음을 밀어내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참고 버티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놓아버릴 때가 있다. 두 바이올린도 마찬가지다. 둘은 무심히 만나고 헤어진다.
대위법(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기법)이 처음 나올 때는 원칙이 분명했을 터. 법을 어기는 순간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자유, 평등, 인권의 개념이 없었을 때라 음악도 목적에 충실했고, 방법은 견고했다. 그러나 인간은 귀하다. 귀는 더 아름다운 것을 듣고 싶었다. 인간을 닮은 음악이 간절했다.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음악의 본질적 목적에 더 가까워졌는지 모른다.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두 선율이 같은 곳에서 마주 보는 순간, 음악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처럼.
바흐가 이곡을 만들 때에는 이미 조성이 확립되었고, 대위법에도 어느 정도는 화성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로 간섭받지 않고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걷는 원칙적인 두 바이올린은 다성 음악의 완전무결함을 보여준다. 음악이 시작하기 전 나는 늘 술래가 되어 누굴 먼저 찾을지 정한다. 두 주인공의 ‘발견 곤란도’는 완전무결한 특징처럼 정확히 똑같다. 그렇게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나는 둘을 동시에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나는 또 뭉클해지고는 혼잣말을 한다. 너무 예쁘잖아!
천재 바흐는 아마 다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돋보이도록 나머지 성부의 화성적 배치를 몰랐을 리가 없다. 이 곡을 제외한 나머지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이올린 두 대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나 바흐는 독주자의 소리만 들리게 하지 않는다. 협연자는 악단과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수평적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한다. 존중으로 화성적 만남이 귀해진다. 음악은 다르게 아름다워진다.
곧 아이들을 만난다. 지금 학교는 거리두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교육청에서는 철저한 거리두기를 하지 않으면 교사를 문책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학교는 사람들끼리 부대끼려고 존재하는 곳인데 철저하게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 나는 어불성설이라 싶었다. 그러나 냉정한 거리 유지로 아름다운 대위법이 있다. 그러다 문득 아름다워지는 화성이 있다. 가보지 않은 학교의 길을 두고 나는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떠올린다. 냉정하고 완전무결한 거리 유지를 언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그러다 문득 만날 수 있을지, 그 만남이 뭉클해질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