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강 베랑길에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봄에는 산을 탔지만, 이 여름에는 해 질 녘 강가에서 자주 자전거를 탔다. 사실 이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나들이가 없었다. 예비군 훈련 같은 여행마저도 갈 수 없었다. 그나마 허락된 콧바람은 근처 공원 산책 정도. 말도 꺼내기 싫은 그 전염병이 이 뜨거운 햇빛에 증발했으면.
8월의 마지막 날이다. 9월이 코앞이라 그런지 바람이 믿을 수 없이 시원하다. 오늘 라이딩은 바람을 느끼기에 최적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산뜻한 바람이 넘치게 불어오니 말이다. 길은 쭉 뻗어있고 퍽 한적해서 나는 손바닥을 펴서 바람을 만졌다. 짧은 순간 눈을 감으니 가을 냄새가 났다. 냉정하게 차가워질 것이라는 바람의 웃음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바람도 길어야 한 달이겠구나.
자전거길 주변에 풀이 많다. 여름 햇살이 좋았는지 풀은 제멋대로 자랐다. 어느 하나도 같은 색이 없고 같은 모양이 없다. 꽃이 내 눈을 더 오래 붙들기도 하지만 풀은 그저 좋다. 풀은 풀에게 다르다 나무라지 않고 틀리다 쫓아내지 않는다. 주어진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과 햇빛과 비를 나눌 뿐. 누구를 탓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 안에서 잎을 뻗는다. 만족과 불만족을 모른다. 욕심은 생겨날 수 없고 이 순간 살아서 그냥 산다, 살아간다.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만지고 풀을 본다. 갈수록 저문 강에 삽을 씻는 사람들이 보인다. 삽자루에 붙은 분노 서린 고단함도 강을 보면, 바람 냄새를 맡으면, 풀과 나무를 만지면 어두워도 달이 보인다. 먹을 것 없는 콘크리트 집으로 결국 돌아간다. 돌아가야 한다.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처럼, 차가웠다가 뜨거워지는 바람처럼, 누웠다 일어나는 풀처럼 우리는 저와 같다. 살아내려고 저문 강에 온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