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사와 대천명 사이
결혼만 하면 아기가 생길 줄 알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오래된 다낭성 난포 증후군으로 담당의는 내 난자가 나이보다 훨씬 늙어 수정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난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맞이한 건 하염없는 기다림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일 아침 108배를 했고, 찾아오는 생리에 눈물이 쏟아지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마음을 비우라고 주위에서 말했지만, 그 마음이 비워질 정도로 학교나 결혼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독보적 영역을 가진 신은 나에게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우울을 선사했다.
우울감에 더 묻히기 전에 나는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우선 인공수정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담당의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마음을 비우는 것도, 마음을 편히 먹는 것도 어차피 글러먹은 지 오래라 나는 시술 날짜를 하루라도 빨리 정하기 위해 그 슬픈 생리가 어서 오길 기다렸다. 그렇다. 생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은 자연임신을 포기했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된 셈. 거짓말처럼 나는 생리를 하지 않았고, 포기하자마자 자연임신을 했다. 센스 있는 신은 내 포기를 꽤 빨리 알아차린 셈.
사람들은 ‘포기’보다 ‘실패’에 훨씬 높은 가치를 두지만, ‘포기’는 아래에 깔릴 만큼 하찮지 않다. 물론 허무주의에 빠진 포기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노력이나 실패 끝에 다다른 포기는 아프게 움켜쥐던 손가락을 펼 수 있는 용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음 비우기, 마음 편히 먹기, 마음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 어려운 것의 다른 이름이 ‘포기’다.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이제 나는 모르겠어요.’ 이런 무책임해 보이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무거운지 포기 후에 성공을 맞이한 사람만 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지만 진인사와 대천명 사이에 반드시 들어가는 과정이 ‘포기’라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주어지는 선물이 ‘포기’고, 진심으로 포기해야만 하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는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지 않고 가볍게 뱉는 수많은 ‘포기’ 때문에 그 가치를 무시당해왔을 뿐. 포기는 도전과 실패만큼 고통스러운 말이다. 수많은 밤 겪은 땀과 눈물, 희망과 좌절, 짓밟힌 자존심과 버거운 책임감, 기대와 비난의 눈빛을 견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대 지금 포기하고 싶다면 포기할만한 자격이 되는지 점검해보기를. 진정한 포기는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하는 포기는 하늘도 쉽게 포기할지 모르니.
다들 집 팔기 어려워 먼저 집을 팔고 집을 사는 게 맞다고 하는데 나는 매도의 압박감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살 집을 먼저 계약했다. 다행히 지금부터 이사까지 5개월의 시간이 있지만, 반드시 집을 팔아야 한다. 나는 날이 더워도 매일 조금씩 살림을 정리하고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매수자에게 깔끔한 집을 보여주려는 목적이다. 조금이라도 시세차익이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욕심이 마땅할 만큼 우리 집값은 오르지 않았다. 이쯤 되면 손해 보고 팔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아니, 나는 이미 을을 자처했기에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단지 처음 겪는 압박감이라 어디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매수자를 상상하며 쓸고, 닦고, 청소하고, 정리하고, 치우고, 버린다. 이러다 보면 포기할 수 있으려나. 집은 주인이 있다는데 누구든 나타나겠지 싶다가 그 주인이 내가 아니기를 바라는 걸 보면 아직 포기의 단계에 이르기는 한참 멀었나 보다.
그나저나 집 팔기 위해 제가 더 노력해야 하는 점이 있다면 좀 알려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