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참 잘 살았어요 도장 찍어주세요
마흔이 넘어가니 나도 동창회에 나간다. 삼십 대까지는 애가 어려 접어두던 욕망이었다. 십 대 때의 친구들을 만나 잔존 기억을 경쟁하듯 꺼내 나눠 먹으면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웃어 좋더라. 내가 이리 해맑을 줄이야!
늘 그렇듯 사람을 만나고 온 날은 더 외롭다. 만난 사람이 많을수록 더하다. 계산과 비교, 후회와 절망이 뒤섞이는 감정으로 ‘아,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다가 ‘또 만나러 가겠지.’라는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좀 멀리 떠나서 살고 싶은데 고작 후보군에 올린 곳이 지금 사는 근처 도시들이다. 그마저도 정착이 주는 편안함에 결국 주저앉을 것 같아, 냉큼 1번 후보 도시의 아파트를 보고 왔다. 좋은 집이었지만 나는 구태여 단점을 찾는다. 후보 2번 도시의 몇몇 집도 핸드폰에서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이상한 내 눈은 장점을 찾다가 단점에서 끝난다. 이사를 할 수 있을까 싶다.
걸어온 내 길이 오로지 내 선택과 의지로만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위안해보지만 만난 사람이 많으면 내가 더 비루해진다. 이쯤 되면 사람이 좋아서 만난 것인지, 내가 걸어온, 걸어가는 길을 평가받기 위해 만난 것인지 헷갈린다. 아니, 차라리 백 퍼센트 내 선택과 의지였다면 좀 더 당당했을까. 오가는 질문-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 살고, 남편은 뭐하고, 자식은 몇이고, 그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을 듣고 있으면 불혹의 나이들이 모인 장면이 아니라 숙제 검사 전 긴장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다. 나에게도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시면 좋겠는데 선생님은 그 도장을 쉽게 찍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아이러니하게 내가 교사다. 나는 나에게 ‘참 잘 살았어요, 살고 있어요’ 도장을 산뜻하게 콩! 찍을 수가, 없다.
역마살이 끼었다고 주절대고 다니지만 나는 정말이지 망각을 원한다. 그래서 바보 같은 선택과 누추한 노력으로 얼룩져버린 삶의 무대를 정기적으로, 꾸준히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과거를 판단하는 여유 따위 부릴 수 없도록 현재에 강력한 충격을 주는 방법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은 손발이 바쁠 테니 머리는 쉬어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갑자기 하얗게 변한 작업화면은 식욕도 배설욕도 잊게 만들지 않는가! 잘 살아왔는가 하는 영양가 없는 자문(自問) 따위는 완벽히 삭제되도록 나는 모든 만남을 잊고 싶다. 다 잊어먹고 산뜻하게 배설한 후 해맑게 사람을 만나고 싶다.
어느 드라마에서 의대생인 여자 주인공이 해부학 실습을 하다가 역겨움을 참지 못해 구토를 하고, 시체의 끔찍함에 기절했다. 여 주인공이 수치스러운 자기 모습을 괴로워하니 남자 주인공이 부끄러움을 다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리셋!" 외치고는 키스를 한다. 와, 정말이지 나는 작가의 통찰력에 박수를 보냈다. 완벽하면서 아름다운 해법이었다.
이사할 집을 찾으며 내가 가진 자본이 나에게 자유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사실-부동산에 관한 내 선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허튼짓이었는가-을 깨닫지만 이마저도 완벽히 까먹기 위해 그나마 주어진 자유로움 안에서 집을 골라본다. 나를 따라다니는 후회와 좌절과 무력함으로부터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도록 나는 지금과 많이 다른 곳을 골랐으면 좋겠다. 내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지는 않더라도 소개팅하는 집에서 단점보다 장점을 찾아보리라. 콧웃음 칠 장점으로 가볍게 선택해야지. 살다가 예측하지 못한 점이 툭툭 튀어나오더라도 그 또한 내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일지니 나는 또 후회하고 얻어맞고 까먹고 배설해야지.
도서관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폭우가 쏟아진다. 집에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왔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이제 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지만 나는 노트북을 덮고 정신없는 와이퍼와 함께 집에 와서 창문을 닫는다. 들어온 빗물을 걸레로 닦고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커피를 마시며 첼로 연주를 틀고 다시 노트북을 연다. 비가 오는데 이유가 없다. 비가 오면 우산을 펴고, 우산이 없으면 맞으면 된다. 젖은 옷은 저절로 마른다. 승려가 수도승에게 내리는 죽비도 모두 수도승의 탓이 아니다. 스님이 더 지루했을지도.
내가 만나는 익숙한 사람, 반가운 사람, 보고 싶은 사람, 알고 싶은 사람, 궁금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닮고 싶은 사람, 닮지 말아야 할 사람, 편안한 사람, 불편한 사람, 특정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 처지가 비슷한 사람, 처지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소나기처럼 내리면 나는 우산을 펴거나 그냥 맞아야지. 그렇게 살다 보면 ‘이거 좋은데?’ 가끔 얻어걸리지 않을까? 없음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