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입신고와 동백꽃

by 물지우개

일단 걷기로 했다. 천천히 알아가듯 걷는 것이 좋았다. 학교에서 내리막길을 쭉 따라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하나로 마트와 농협이 있다. 왼쪽으로 가면 추봉교가 보인다. 거기서 더 가면 뭐가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오늘은 그 중 왼쪽 길이다.

내가 사는 진두마을은 한산도에서 중심마을이 틀림없다. 일단 유일한 학교가 이곳에 있다. 왼쪽으로 조금만 걷자 면사무소가 보인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 오자마자 저곳에서 전입신고를 했다. 그날 전입신고를 위해 우리 네 명이 면사무소에 등장하자마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목이 집중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전입신고를 하러 왔어요.”


예전에는 동사무소에서 전입신고를 한다고 하면 번호표를 뽑고 서류를 작성하고 의자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작성한 서류, 준비한 증빙서류, 도장을 제출하고 무심히 기다리면 된다. 끝나고 확인차 등본을 한 통 떼보는 게 다였다. 여긴 달랐다. 우리가 떼로 와서 전입신고를 한다고 하니 반가우면서도 신기해하는 눈빛이다. 이미 어느 분은 우리를 위해 커피를 가져오셨다.

“애들은 전학 오나 봐요?”

“네. 올해 5학년, 2학년이에요.”

“잘 오셨어요. 반가워요.”

또 다른 직원은 테이블 위에 있는 떡도 먹어보라고 갖다 주신다. 어떻게 섬에 왔느냐고 궁금함이 폭발한 얼굴들이다. 우리는 면사무소의 환대가 얼떨떨했다. 우리가 전입하는 주소는 바로 학교 주소였다. 우리에게 학교는 공식적인 집인 셈이다. 한 달 지나면 뱃값도 도서 민으로 할인을 받는단다. 전입신고가 끝나자 전학확인서를 받았다. 예전에 근무했던 학교에서 전입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다. 전학하러 온 학부모님은 아이 손을 잡고 쭈뼛거리며 교무실에 들어오셨다. 나에게 전학확인서 종이를 내밀 때는 그것이 귀한 듯, 한 번 더 쳐다보고 내밀던 일이 생각났다. 전학을 허락하는 그 작은 종이가 어머니에게는 얼마나 뜻깊고 의미 있는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것을 손에 쥐기까지 많은 역사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는 내 손에 전학허가서 있다. 한산초등학교에 직접 제출할 종이 말이다. 며칠 뒤 내가 그 종이를 내밀 때는 어떤 기분이 들고 어떤 표정일까 궁금해진다.

면사무소 앞마당에는 소방차가 한 대가 서 있다. 면사무소 맞은편에는 한산우체국이 있는데 면사무소와 우체

국이 바로 동네 고양이들의 안식처인가보다. 고양이들은 제집인 냥 편안히 오가거나 심지어 누워있다. 우체국 앞은 특히 화분이 아주 많다. 누가 가꾸는지 관리도 아주 잘 되어 있다. 본격적인 봄이 되면 이 화분들이 더 빛날 것 같다. 우체국 옆에는 한산 반점이 있는데 치킨도 같이 한다 광고 종이가 붙어 있다. 한산 반점 맞은편에는 한산 노래방이 있고 그 바로 옆은 한산면 보건소다. 보건소 건물은 면사무소처럼 제법 컸다. 보건소 건너편은 사택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아마 면사무소나 보건소 직원들의 사택일 것이다. 그곳의 태양광 발전판이 아주 거대하다. 그 길로 약간 오르막길을 오르면 벤치가 있었다. 아! 동백꽃이다. 동백꽃을 보자마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여기서 이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너는 있구나.”

파란 하늘과 바다, 산, 주홍빛 추봉교를 배경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 동백꽃에 그만 반해버렸다. 붉은 입술이 감싸고 있는 가슴 속 샛노란 진심 같은 자태가 아름다웠다. 원래 동백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여기서 보고 저기서 봐도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꽃을 집으로 모셔오고 싶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몇 개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도 아쉬워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싶다!”

그림은 사진과 매우 다르다. 사진은 장면을 포착하여 셔터를 누르면 할 일이 끝나지만 그림은 셔터를 누르는 그 과정이 매우 길다. 물론 사진은 포착하는 과정이 길기 때문에 사진과 그림 두 예술의 경중을 따지고 싶지 않다. 내가 본 동백꽃, 동백꽃을 찍은 사진, 그것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다면?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졌다. 추봉교를 왕복하여 걷고 집으로 돌아온 후 바로 그림 그리기에 돌입했다.

예전에 색연필로 그리는 식물 세밀화인 ‘보태니컬 아트’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색연필은 뾰족해서 식물의 세밀한 곳까지 표현할 수 있고 혼색이 쉽다.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지우개도 있어 큰 부담 없이 배울 수 있다. 그 경험을 되살려 동백꽃을 그려보기로 했다.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역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형태를 잡고 베이스 색을 칠했다. 그 붉은 입술과 샛노란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혼색할 때는 심지어 떨렸다. 그렇게 첫 그림 ‘동백꽃’이 완성되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대견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볼 것도 많고 그릴 것도 많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시간이 많다. 유유자적한 예술가가 된 듯 섬에 조그만 오두막에서 동백꽃을 그리니 즐거웠다.

전입신고동백꽃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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