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할머니

by 물지우개

섬에 있는 동안 내가 가장 사랑한 장난감은 재봉틀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장난감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느질에 미쳤다. 틈만 나면 무얼 만들지, 어떻게 만들지 생각했다. 배운 패턴을 여러 번 연습했고, 그 패턴을 나름대로 변형하기도 했다. 동영상을 보고 따라 하기도 했고, 책을 보고 해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가장 많이 읽은 책도 바느질, 핸드메이드에 관련된 책이다. 하나의 원단으로 만들기도 했고 어울리는 원단으로 조합도 했다. 아이들 바지, 티셔츠, 남편 셔츠, 내 원피스와 치마, 재킷, 가방, 이불, 커튼, 파우치, 패드, 앞치마 등 많이 만들었다. 내 작품은 온 집을 점령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많이 보냈다. 버려지는 조각천을 잇기도 했고 누비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재봉틀 덕분이다. 재봉틀을 만나게 해준 공방식구들 덕분이다. 공방식구를 만나게 해준 한산도 덕분이다. 한산도에 오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이 재미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재봉틀에 앉아 있으면 걱정을 할 새가 없다. 걱정이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몰입된다. 시선은 바늘에 고정해야만 하고 손은 천을 잡고 있어야 한다. 눈과 손을 온전히 뺏긴 채 빠져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내 손에는 뿌듯한 작품이 들려있었다. 완성품을 보고 있으면 행복했다. 걱정이 옅어지거나 잊혔다. 걸러지지 않는 큰 걱정이 머리를 점령하고 있으면 오히려 바느질이 잘 안 되었다. 바느질 선이 비뚤어지기도 하고 엉뚱한 곳을 박기도 했다. 걱정을 접어두고 눈과 손을 몰입해야만 바늘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사실 알고 보면 크든 작든 걱정만큼 무용한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재봉틀은 내 머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필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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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친구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느냐고 되묻는다. 제발 사서 쓰라고 명령하기도 하지만 전혀 힘들지 않다. 나에게는 일이 아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 재봉틀은 나를 재밌게 해주는 참 좋은 장난감일 뿐이다. 그러니 나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난감을 재밌게 갖고 노는 어린아이에게 갖고 노느라 힘들지 않으냐고, 그런 수고는 그만하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이 작품은 어떤 점이 재미있었냐고, 다음 작품은 어떤 거냐고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것보다 더 만들어 달라고 했으면 좋겠다. 내 옷이 너무 예쁘니 만들어달라고 졸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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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만들고 싶은 것이 아직 너무 많다. 뭔가를 밤 새워서 해본 적 없는 내가 바느질을 할 때는 밤을 새워서 했다. 피곤한지도 몰랐다. 밤새도 다 만들지 못했을 때는 짧은 밤이 아쉬웠다. 내년에 복직하더라도 틈만 나면 재봉틀 앞에 앉을 것이다. 아마 일을 하게 되면 무용한 걱정들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재봉틀은 할머니가 되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재봉틀만 하면서 온종일 놀고 싶다. 빨리 늙고 싶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되면 그것이 가능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결혼하면 이불이나 베개도 만들어 주고, 배냇저고리도 짓고 싶다. 손자 내복도 만들고 사위, 며느리 조끼를 지어주고 싶다. 집에 올 때마다 하나씩 입혀보며 흐뭇해하고, 멀리 살면 설레는 소포를 보낼 것이다. 그런 노년을 상상하면 행복하다. 노년이 두렵기는커녕 얼른 할머니가 되고 싶다. 돋보기를 끼고 재봉틀에 앉아 있는 행복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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