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마을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거나 마을이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질 때 아름다웠다. 마을에서 보는 섬과 바다 풍경도 찍었다. 그 느낌이 좋을 때면 글이 쓰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색연필화는 글쓰기와 비슷하다. 첫째, 시간이 오래 걸린다. 책을 한 권 읽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지만 한 페이지의 글을 채우는 것은 한 자 한 자 신중하기에 더딜 수밖에 없다. 색연필화도 마찬가지다. 완성된 그림을 보기는 쉽다. 곧장 느낌이 떠오른다. 그러나 세밀한 색연필의 터치가 스케치북을 채우려면 꽤 오래 걸린다. 두 번째, 정리되지 않고 모호했던 생각이나 감정이 분명해진다. 글을 쓰게 되면 평소 생각하던 것이 모이고 적절히 정리된다. 글의 형태가 어떠하든 생각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연필화도 비슷하다. 대상과 비슷해 보이는 색을 색연필 중에 골라야 한다. 없으면 여러 색을 섞어야 한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색도 만들어 내야 한다. 색에 대한 모호했던 생각이 여러 번 터치를 통해 모이고 정리된다. 그렇게 사진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어떤 것은 생략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진보다 도드라지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내 감정이 투영되어 정리된 결과물이다. 셋째, 기억에 오래 남는다. 글을 쓰면 기록이 남기 때문에 설령 기억이 희미해지더라도 얼마든지 기록을 꺼내어 되새겨 볼 수 있다. 사진도 기억을 되살려 주지만 오랜 시간 공들인 색연필화는 사물을 표현할 때의 감정까지 나타나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사진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일기처럼 편하게 쓸 때도 있었고 강렬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을 때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행문처럼 여정을 중심으로 기록할 때도 있었고 계획을 세울 때도 있었다. 텔레비전을 안보는 대신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YTN 채널을 주로 고정해놓고 들었다. 방송을 듣다가 좋은 생각이 날 때는 YTN에 문자를 보내기도 했는데 보내는 사람이 잘 없는지 내 글은 전부 방송이 되었다.
“저 지금 2시간 트레킹하고 허겁지겁 점심 먹고 있어요. 제가 한산도라는 섬에 들어와서 산 지 보름 정도 되었거든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저는 이 섬을 걸으며 예쁜 사진을 찍는 것이 요즘 저에게 가장 행복한 운동입니다.”-2018.03.13.
“안녕하세요. 한산도에 사는 두 아이 엄마예요. 3월부터 한산도로 보금자리를 옮기며 티비가 없어지고 제 삶은 라디오와 함께하네요. 특히 라디오 청취의 9할이 YTN이에요. 저는 YTN 라디오를 들으며 섬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며 풍경 사진을 찍어요. 그 사진을 색연필로 그린답니다. 어느새 그림이 5장이 되었어요. 색연필화를 한 장 완성하는데 보름쯤 걸리는데요. 완성할 때마다 뿌듯함을 넘어 행복함을 느낍니다. 이 그림처럼 이곳 한산도에서 1년간의 제 삶이 제 인생에서 반짝반짝 빛나기를….” -2018.05.14
“안녕하세요. 한산도에 사는 두 아이 엄마예요. 제가 지금 라디오를 들으며 색연필 풍경화를 그리는 중인데요. 제가 색연필 깎는 것을 힘들어하니 딸이 와서 깎아주네요. 어찌나 편한지 그림 진도가 팍팍 나가요. 딸한테 고마워서 어떤 음악이 듣고 싶냐 하니 ‘냉면’이 듣고 싶데요. 색연필 깎는 딸을 위해 신청합니다. 냉면 꼭 틀어주세요.”-2018.06.17.
“안녕하세요! 한산도에 사는 두 아이 엄마예요. 오랜만에 문자 보내요. 드디어 어제 어린이들이 개학했어요. 야호! 기다리고 기다리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죠. 자전거도 타고 그림도 그리고 이렇게 YTN도 듣고요. 제가 있는 이곳 통영시 한산면은 지금 하늘이 너무 맑고 예쁘답니다. 곧 비구름이 몰려올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맑음이에요 바람도 습하긴 해도 시원해요. 이번 여름 정말 더웠죠? 더위 안타는 저도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여름을 보냈어요. 이곳에서 주어진 일 년 중 벌써 두 계절이 지나고 이제 가을과 겨울이 남았어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제 기억 속에 아주 깊이 새겼어요. 제게 남은 나머지 섬 생활도 너무 기대됩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지금도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고요. 아나운서님 저 응원해 주실 거죠?”-2018.08.28
라디오에서 내가 보낸 글을 아나운서가 읽을 때는 정말 흥분되고 재미있었다. 아이들도 신기한지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아이들과 저녁에 도서관에 있을 때는 주로 그림을 그렸다. 어느 순간부터 사진을 찍을 때도 그림을 고려하여 찍었다. 내 그림은 A4 크기라 사실 크지 않다. 그러나 색연필이 워낙 세밀하고 그림 전체에 적어도 두세 번은 혼색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매일 ‘여기까지 그릴 것이다’라고 마음속에 목표를 정하고 작업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완성까지 너무 더뎌 힘이 빠졌다. 하늘이나 바다는 마을이나 산보다 표현하기가 쉬웠다. 마을이 너무 크거나 복잡할 때는 힘들어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동백꽃, 매화꽃, 수선화, 자화상을 난 후 본격적으로 풍경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어포에 다녀오고 난 후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문어포에서 사진을 찍을 때부터 그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마저 들었다. 문어포를 완성하고 난 다음부터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장작지, 하포, 대촌, 장곡, 의암, 개똥골, 곡룡포, 대고포, 비진도까지 여러 곳을 그렸다. 신기한 것은 마을을 그릴 때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풍경을 그리지만, 공방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함께 담으려 애썼다. 그림에 그분들 모습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분들의 살아가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렸다. 주말에 섬에서 나갈 때도 스케치북과 색연필은 꼭 챙겼다. 물론 섬에 들어올 때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