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5

2019.01.30

by 물지우개


한산도에서 일상이 15일이 남았다. 설날 연휴와 주말을 빼면 열흘 남짓이다. 마지막이 아득해 보이던 시간도 결국 끝나간다. 시간은 정직하고 공평하니, 붙잡고 싶고 아쉬운 마음도 소용없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대신 이곳에서 열심히 놀았고 열심히 쉬었다. 편안하고 재미있었으며 황홀한 시간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다시 섬에 왔다. 겨울의 복판이지만 햇살은 포근했고 미세먼지의 공격에도 굳건히 맑다. 지난해 끝 무렵에야 처음으로 서진이 머리를 자르러 마을미용실을 찾았다. 나와 같이 요가를 배우기도 했고, 나처럼 그림도 재봉틀도 좋아하신다는 미용실사장님은 이번에도 서진이의 머리를 반듯하게 잘라주셨다. 서울 말씨를 쓰는 그분은 내 눈에 우아했고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3년만 미용실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 어느새 7년을 넘기고 있다고 하신다. 무엇 때문에 그 분은 낯선 섬마을의 미용실을 이토록 오래 붙들고 있을까. 삶의 가장 치열한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기에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섬이 매력적이었을까. 치열할 수밖에 없는 근원인 자식과 돈이라는 목적에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으셨을까. 수시로 아름다운 것을 봐야하는 성이 는 마음을 더 내버려 두고 싶으셨을까. 섬 할머니들의 전형적인 컷트와 퍼머를 도맡으며 육십대 후반인 사장님을 젊게 봐주는 할머니들의 시선에 정말 젊어지는 기분이었을까. 나의 이 모든 예상에 백 프로 맞다 장담할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친구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고향친구가 이 섬에 살기 때문이다. 두 분의 고향이 충청도의 소도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산도에서 만난 고향친구에 대해 강력한 유대감은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스무 살 이전의 기억은 삶 전반을 지배한다. 치열하게 사는 동안은 떨어져 있다가 고향과는 아주 먼 이곳 섬에서 노년에 만난 어릴 때 친구라면 두 분 사이가 어떤 감정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두 분 모두 배우자가 있지만 배우자가 주는 안정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으로 서로 기대어 섬을 살아간다. 두 분은 우주처럼 커 보이는 우정의 힘으로 3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어느 한분이 섬을 떠나게 된다면 다른 분도 기꺼이 같이 가시리라 예상해 본다.


부럽다. 그 우정이 부러워 질투가 날 지경이다. 나에게도 그런 우정이라 말할만한 친구가 있었다. 감정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고 감탄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내가 쏟아낼 마음이 많을 때 친구는 받아줄 여유가 없었고 내가 아름다운 것에 친구는 동조하지 않았다. 친구가 성의 있게 내뱉는 말이 나에게는 가시가 되어 박혔고 필요충분조건인 남편처럼 그 가시를 빼려고 기꺼이도, 힘겹게도 노력하지 않았다. 친구를 무 자르듯 자르지 못했지만 나는 그 비슷한 제스쳐를 취해버렸고 그것은 친구에게 가시보다 더한 깊은 상처를 주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더 나빴다. 자른 무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면 무씨를 새로 뿌리면 되지 않느냐 반문하겠지만 이미 마흔이라 새 친구와 다시 시작해도 나는 어리지 않다. ‘어린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연락처를 찬찬히 다시 봐도, 카카오톡 친구리스트를 곱씹어 보아도 나와 강한 유대감을 나눌만한 벗은 찾을 수 없다. 눈 질끈 감고 한번 기대볼까 하다가도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계산하고 있고, 나를 향한 그녀마음의 무게가 결코 나와 비슷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면 내 핑크빛 프로포즈는 금세 싸늘해져 있다. 감히 계산이 끼어들 틈 없는 우정이 부럽다. 아니 계산이 떠오르지 않는 친구가 되지 못하는 내가 참 못나다. 가진 것을 키우는 것도, 지키는 것도 못한 패배자가 된 내가 밉다.


다시, 섬에 오니 마음이 투명해진다. 도시에서는 잊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던 내 마음이 섬과 마주하니 소금뿌린 미꾸라지 마냥 속이 들여다보인다. 그랬다. 섬은 기대보다 더 아름답게 나를 비추기도 했지만 차마 보고 싶지 않은 못난 모습도 그대로 투영한다. 그래도 어쩌랴. 이 지경이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해야만 하는 나다. 섬에 와서야 수백만 가지 색 중에 나를 명명하는 색깔을 발견한다. 나를 인정하는 색을 만나니 어느덧 눈물이 난다.


오늘 중 해가 더 포근해지면 미용실에 가봐야겠다. “커피 한잔 주세요!”라며 빼꼼히 문을 열고 필살기 미소를 날리며 들어갈 생각이다. 믹스커피를 마시며 두 분의 우정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야겠다. 나는 차마 갖지 못한 아름다운 사연에 감탄하거나 우정에 금이 갈 뻔한 위기의 사연에 나도 일말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그러다가 또 다른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겸허히 인정했으면 좋겠다.


황홀한 시간이 딱 보름 남았다. 오늘은 미용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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