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

2019.01.31

by 물지우개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날이 어두웠다. 어제밤 이불을 덮고 누워 책을 읽다가 손이 시려 그만 두었다. 눈이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운동을 나가던 남편은 비가 온다며 도로 들어왔다. 인근에 아무리 폭설이 내려도 한산도는 결코 눈이 오지 않았단다. 이 곳 아이들은 눈을 거의 보지 못했다며 볼멘소리로 하소연하던 주민의 말이 떠올랐다. 건조에 예민한 호흡기인데다가 새해가 되어 맞는 개학 날이니 비마저 축복처럼 느껴져 나는 반가웠다.


김밥을 싸야하나 말아야 하나 어제 잠시 고민을 했다. 양산집에서 이틀전에 김밥을 싸기도 했고 이번주는 장을 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김밥은 공방식구들에게 나를 각인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제 오후 창동까지 걷다 돌아오는 길에 농협에 들러 김밥재료를 사오고 말았다. 아! 농협에 가기 전에 미용실에 들러 인사를 했다. 마침 미용실안에는 사장님의 친한 고향친구이자 나를 주민센터로 안내하신 어르신부부가 앉아 계셨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지만 내 계획이던 두분의 우정스토리는 들을 수 없었다. 손님이 많았고 사장님은 분주해 보였으며 용기마저 부족했다. 그래도 어르신들의 나를 향한 대견한(?) 눈빛에 기분이 좋았다. 여느때처럼 김밥재료를 샀고 학교로 올랐다. 2동사택옆에 뿌린 시금치 씨앗이 어느새 싹을 틔워 잎이 커졌다. ‘무성’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괜찮은 외모가 된 시금치를 몇개 뽑았다. 마트에 파는 시금치에 비하면 ‘허약’해도 나에게는 기특한 시금치다.


불린 쌀에 다시마를 넣어 밥을 앉히고 시금치를 데쳤다. 간장, 매실, 설탕, 후추를 섞은 양념에 어묵을 조리고 햄을 볶았다. 단무지를 씻어 물기를 빼는 동안 맛살을 반가르고 묵은지를 씻었다. 김밥을 마는 동안 나의 단골채널인 뉴스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부스스 눈을 떴지만 등교에 설레는지 이내 식사를 시작했다. 공방에 가져갈 김밥을 통에 넣고 설거지를 마치니 남편과 아이들도 등교준비가 끝났다. 우리는 경건한 의식처럼 배꼽에 손을 모아 맞절을 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네. 재밌게 놀다오세요.”


경건한 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도 뒤돌아 손을 흔드는 서연이의 얼굴도, 계단을 급히 뛰어오르는 서진이의 뒷모습도, 그런 아이를 향해 ‘복도에서는 달리면 안돼!’ 라고 소리치는 나도 얼마남지 않았다. 같은 일상이지만 매순간이 귀하다.


공방에 가서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과 포옹을 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식구들에게 좋은 냄새가 났다. 커피를 마시며 근황을 나누었다. 평소처럼 농담을 하며 웃었고 요즘 공방에서 핫한(!) 강아지옷에 감탄했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니 와! 눈이다. 처음에는 비가 굵게 오나 했는데 분명 흰 눈이었다. 창밖으로 보는 것으로는 아쉬워 밖으로 나갔다. 눈오는 선착장은 아름다웠다. 섬은 숨겨둔 마지막 선물을 보여주는 듯 했다. 코는 시렵지만 마음은 포근했다. 섬이 준비한 선물을 받기만 해도 나는 뻔뻔하게 행복했다. 섬은 내가 잊었던 내 깊은 곳 마저도 편하게 꺼내게 했고 품어주었으며 인정했다. 나는 그 안에서 당당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자유롭고 행복했다.


우리는 여전히 파티같은 점심을 먹었다. 주인공은 동좌에서 온 계란말이, 장곡에서 온 김치, 국립공원의 김, 농협마트의 컵라면과 소시지, 그리고 내 김밥과 멸치 반찬이다. 오늘은 한산도에 첫 눈이 왔고, 아이들은 한 살 더 먹고 등교했다. 나는 선생님이 던져주신 천으로 능숙하게(?) 우리집 낡은 찜질팩커버를 만들고 선물할 손가방도 만들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키를 재봤거든. 내 키가 얼마인지 알아?”


집에 오자마자 흥분한 서연이는 나를 향해 묻는다. 벌써 내 키에 임박 했을까봐 나는 조금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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