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이사 가자

by 물지우개

누구든 한 번쯤 꿈꾸지 않을까? 넓은 정원에 철마다 다른 꽃이 피고 마당 구석에는 잘 생긴 진돗개 한 마리가 서있는 장면. 아들은 마당에서 공을 차고 남편은 바비큐를 한다. 딸은 마당이 훤히 보이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나는 꽃에 물을 주고 있다. 흔히 떠오르는 ‘전원주택’의 삶 말이다.

일터에 따라 많은 시설이 도심에 모이고 ‘편리’라는 강력한 이점으로 사람들은 쉽게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거기다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도시에서도 쩔쩔맬 만큼 힘든 일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학원, 병원, 마트 등 도시는 편리하기에 더 멀어진 전원생활을 강력히 꿈꾸게 한다.

도시의 일자리를 과감히 포기하더라도 사람은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하니 귀촌은 결코 만만치 않다.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말이 쉽지 농사가 어디 쉬운 일이랴. 맨땅에 헤딩해서라도 축구공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바닥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데 요즘에는 맨땅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보니 시골도 생각만큼 저렴하지 않다.

나는 잠시 섬에 살았지 귀촌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일 년살이’였다. 정착하기 위해 절실히 일터를 찾고 적응하고 동화하지 않았다. 벌이 없이 한시적으로 잠시 맛만 보았다. 어떻게 보면 놀고먹을 수 있는 편한 팔자였다. ‘너네 부부니까 가능하지.’라는 비아냥거림도 마땅하다. 잠시 놀다 가면서 책도 쓰고 시골에 대해 아는 척하는 나를 꼴사납게 보는 시선도 이해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잠시였지만 그 맛은 상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짧은 시식을 위해 손 뻗은 내 용기가 스스로 기특할 정도였다. 그곳의 시간, 공간, 사람, 자연은 나를 바꿀 만큼 뒤흔들었다. 그 해를 기점으로 달라진 점이 많다. 집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의 공부보다 놀이에 눈이 더 갔다. 아이들의 말보다 표정이나 몸짓에 예민해졌다. 직장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에서는 수단이나 내용보다 목적을 궁금해했다. 사람을 만나면 순간의 기분보다 의도가 알고 싶어 졌다. 티브이나 책을 보더라도 나를 위한 이야기보다 세상 사는 이야기가 재밌어졌다. 즉, 나무만 보던 눈이 숲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변한 내가 신기했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는 삶을 ‘역마살’이 꼈다고 말한다. 짐을 싣고 이동하는 말은 역에서 쉬면서 밥도 먹고 잠도 잔다. 그러다 짐이나 사람을 바꿔 다른 역으로 이동한다. 지금의 기차와 비슷하다. 어쩌면 고단하고 불쌍한 신세다. 그런데 ‘살’까지 붙으니 정착하지 못하는 삶은 인간의 삶을 괴롭히는 기운이다. 역마살이 낀 삶은 글자 그대로 옳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삶을 살고 싶다. 그 일 년 동안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삶이란 유한하고 일회적이다. 윤회를 믿더라도 전생을 기억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좁은 대한민국이다. 고향을 벗어나 정착해도 정착했으면 붙박이가 여러모로 편하다. 이상하게도 나는 편하지만 답답하다. 다른 삶이 궁금하다. 경험하고 배울 게 산재해 있다 생각하면 아프더라도 부딪히고 싶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역마살이 낀 게 분명하다.

오늘도 다른 곳을 꿈꾼다. 이 아파트도 일 년밖에 안 살았는데 이사 가고 싶다. 티브이에서 보이는 전원주택이나 시골을 보면 두근거린다. 거의 기억에도 없는 강원도가 아름답다. 때가 되면 날아오는 ‘타시도 전출, 파견’이라는 공문에는 정신이 없어진다. 지나가는 KTX,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시선이 멈춘다. 이렇게 내 안의 이동 에너지를 축척하다 갑자기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면에 숨어있는 나도 모르는 내가 엄청나게 궁금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변하는 경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입체적이고 복잡한 내 모습이 분명히 숨어 있다 생각한다. 나는 여러 곳의 다양한 삶에서 체득하며 발견하고 싶다.

주체할 수 없는 역마살로 하루빨리 용기 있는 현실이 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