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이 있다. 친정에서 보관하다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려는 생각에 언제부터인가 일기장은 학교, 내 교실에 있다. 학년 말 짐을 챙길 때 가장 먼저, 소중하게 챙기는 보물이다. 일기는 2학년, 88년 9월부터 6학년 말, 93년 2월까지 썼는데 모두 14권이다. 6학년 때 쓴 일기가 5권으로 가장 많고 2학년 일기는 1권이다. 2학년 일기장 공책 값이 110원이고 마지막이 200원이다. 공책 값만큼 내 글씨도 조금씩 변해있는데 6학년 때의 글씨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지금의 나보다 더 잘 쓴 글씨도 보인다. 2~3학년 때 일기 줄거리는 주로 친구와 논 이야기다. 고무줄놀이, 롤러스케이트 타기, 그네 타기, 술래잡기 등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쓰고는 대부분 ‘즐거운 하루다, 재미있었다.’로 끝났다. 가족 이야기도 더러 있는데 시장에 간 이야기, 엄마 심부름하기, 할아버지 댁이나 사촌 집에 간 일이 많다. 특히 친구 집을 갔을 때 그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거나, 아파트가 넓었다고 부러워했고, 가족과 시장에 간 일기에는 물건 종류와 값을 정확히 적어놓았다. 반공영화를 보고 쓴 일기에는 그 당시 우리나라가 정말 못 살았다는 걸 강조했다. 어렸지만 넉넉하지 않은 우리 집 살림을 이미 알아차린 듯 나는 돈과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4학년 때 일기는 시나 노래 가사가 꽤 쓰여 있다. 동화책을 읽고 느낀 점도 많이 썼는데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내 마음이 자주 보인다. 심지어 ‘일기를 잘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일기 쓰기에 대해 대 놓고 고뇌한 페이지도 있다. 선생님이 덧글은 고사하고 ‘참 잘했어요’ 도장도 거의 없어 그리 힘들었을까 싶다. 5~6학년 일기는 확실히 이전보다 내용과 양에서 발전했다. 의성어, 의태어도 많고 혼잣말이나 대화도 많다. 도립도서관 선생님이 불친절해서 학생들이 한 명도 안 올 것 같다는 비판도 있고 나를 좋아하거나 내가 좋아한 남자 친구 이야기도 등장한다. 학교에서 시험을 다 끝내 ‘자유의 새’가 되었다던가 이 일기장을 ‘자신의 역사책’으로 정의하며 ‘영원히 남을 소중한 보물’이라며 예언했다. 특히 6학년 때는 한 편에 한 페이지를 꽉 채워야 하는 강박증이 있었는지 ‘우리들의 슈퍼스타, 강현정 나가신다’ 라던가 ‘어유, 이 멍청아! 정신 차려!’ 라며 굳이 안 해도 되는 솔직한 내면까지 쥐어짜 가며 페이지를 채우는 성실함을 보였다.
일기를 읽으면 나는 어린이 강현정이 된다. 분명 내가 쓴 글이지만 쓴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읽기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서서히 그 시절의 나로 변한다. 마치 방금 쓴 것처럼 그때 있었던 일, 느낌, 생각이 생생히 떠오른다. 타인의 글에서는 아무리 읽어도 경험할 수 없는 신기한 체험이다. 체육 시간 배구를 배울 때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는 글에서는 진짜 심장이 두근거리고 ‘공에 맞아 팔이 너무 아프다’에서는 나도 모르게 팔을 문지르고 있다. ‘집에 가서 연습 많이 해야지. 그래서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배구를 잘해야지. 손이 아프더라도 많이 연습해야지’라며 일기를 마치는 혼잣말에서 마음이 찌릿찌릿하다.
일기가 오래될수록 내가 어린이가 되는 정도는 더해진다. 6학년 일기가 길고 자세해서 그 반대일 것 같지만 짧지만 담백한 2학년 일기가 마음을 더 움직인다. 내 일기를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본다는 눈치도 없고 사실 아는 단어도 많이 없던 시절. 비유, 대화, 혼잣말을 기록하는 법도 모른다. 오로지 의식의 흐름대로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한 그 일기를 읽으면 어느새 어린이가 되어 있다.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던가, 나는 3개밖에 안 먹었는데 오빠는 갈비를 많이 먹어 샘이 났다는 글에서는 슬며시 웃다가 어느새 울고 있다.
선생님의 확인도 인상적이다. 어느 선생님은 도장만 찍어주셨고 어느 선생님은 ‘검’이라고 빨간 색연필로 적어주시기도 했다. ‘잘 썼어요.’라고 쓰기도 했고 틀린 글자를 고쳐주기도 하셨다. 지금도 모습이 떠오르는 어느 선생님은 제법 많은 덧글을 써주시기도 했다. 약수터에서 서로 물을 뜨려고 싸우는 모습을 쓴 일기의 끝에는 ‘양보는 상대방은 존중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현정이의 마음에 벌써 양보할 줄 아는 심성이 있다니 선생님은 기쁘다’며 많은 글을 써 놓으셨다.
선생님의 흔적은 내 일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귀찮더라도 쓰고 자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한 건 지금껏 남은 일기장을 봐도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덧글로 나는 더 착해져야 했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엄마 아빠 말씀은 무조건 잘 들어야 하는 마음을 가졌다.선생님이 고쳐주시는 잘못 쓴 글자는 너무 부끄러웠다. 6학년 끝에는 일기장인데도 교과서처럼 너무 반듯했고 내 감정을 숨겼다. 부끄러워도 솔직한 내 생각과 느낌을 존중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글은 거의 안보인다.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투명하게 반추하는 글이 아쉽다.
1학년 1학기 마지막 국어 단원에서는 일기 쓰기를 배운다. 이번 방학 때 드디어 우리 아이들이 일기를 시작한다. 낡은 선생님의 일기장은 아이들의 눈을 빛나게 했다. 이제 막 글자를 익혀 문장을 쓰기 시작한 아이들의 습작을 내가 인정하자 아이들은 일기를 자랑하기 바빴다. 그 일기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얼굴과 성격이 모두 다른 아이들처럼 내 반응도 아이들마다 다 달라야겠지? 일기를 확인하는 순간만큼은 강현정 선생님보다 어린이 강현정으로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