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대응 에너지

오늘도 죽음에 한 발짝 가까워진 그대여.

by 물지우개


죽음은 예고가 없다. 자신이 정확히 언제 죽는다고 예언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예언대로 정말 죽을까? 오늘 우리 집에 날아다닌 파리는 내가 휘두른 파리채에 의해 갑자기 죽었다.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오니 예쁘던 소국이 말라죽었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봐도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 나도 그렇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죽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는 사실은 살아있는 현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환상이나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대충 살자는 허무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쓰려는 글은 갑자기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갑자기 죽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날카롭고 공격적인지, 우리는 그 엄청난 기습공격에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가까운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남은 사람을 파괴할 정도의 에너지를 가졌다. 산자에게 이보다 더한 공격은 없다. 특히 가족의 죽음은 그 충격이 상상 이상인데 내가 본 첫 경험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중학생 때부터 몸이 편찮으셨다고 한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도 비슷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는 아래채에 이불을 펴고 늘 누워계셨다. 농번기 때 온 식구가 정신없이 바빠도 할아버지는 가족이 일하는 모습을 논두렁에 앉아 쳐다볼 뿐이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할머니는 동네에서 유명한 호랑이가 되었고 어린 나이에 결혼한 엄마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식도암에 걸려 결국 내가 6학년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암투병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꽤 오랜 기간의 투병이었다. 병원도 포기한 할아버지는 시골로 온 지 며칠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충분히 예상한 죽음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갑자기’였다.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아버지는 바로 쓰러졌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서럽게 울며 그리워했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시는 동안 수첩에 기록을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는 이미 정리한 유품과 달리 그 수첩만큼은 자주 들여다보며 괴로워했다. 꾹꾹 눌러쓴 활자로 할아버지를 추억했고, 지워졌거나 찢어진 활자는 꿈에서도 알고 싶어 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노래, ‘불효자는 웁니다’는 매일 밤, 좁은 우리 집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가 엎드려 흐느끼던 소리, 결국 베개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쏟던 모습, 그러다 고개를 들면 눈가에 번진 눈물자국, 꿈에서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보고 싶다 하시던 그 아버지를 나는 마흔이 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진혼곡은 아버지만의 ‘방어’였다. 갑자기 겪은 죽음이라는 공격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죽은 자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더 강하게 살아남기 위한 산자의 생존법이었다. 그런데 방어의 몸부림은 길고 세서 다른 가족마저도 아프게 했다. 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은 한동안 많이 어두웠다.

아무리 슬퍼한들 슬퍼하는 행위 자체가 죽음을 되돌릴 수 없고, 죽은 자를 위한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타인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라면 한가하게 슬퍼하는 것도 사치일 수 있다. 갑자기 다가온 죽음은 남겨진 자에게는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공격이니 그 어떤 모습으로 대응하더라도 뭐라고 쉽게 논할 수 없다. 남겨진 자는 단단히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슬픔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대응은 자신도 몰랐던 내부 에너지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이니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지켜보는 자가 ‘더 이상 슬퍼하지 마라’든가, ‘그래 봤자 다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할 권리도 없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아직 나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 내 안에 ‘죽음 대응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모습으로 표출할지 알 수 없다. 타인의 죽음을 겪기 전에 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 내 죽음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공격 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 확실한 건 나를 포함해서 누구나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죽음에 한 발짝 가까워진 그대여.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응하는 모습 또한 숭고한 삶의 한 모습이니, 그 시절 아버지의 숭고한 슬픔을 추억하며 눈을 감고 잠시 나의 ‘죽음 대응 에너지’를 가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