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빵을 구웠다. 2년 전 잠시 육아휴직을 했을 때 제빵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그 전에도 블로그나 아는 언니를 보며 빵을 만들었다. 워낙 빵을 사랑하는 덕분에 홈베이킹의 수고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물론 맛은 사 먹는 빵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빵지 투어’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이거다! 무릎을 쳤고, 여행지에서 이름난 빵집을 들르는 일은 중요한 일정이었다.
빵의 종류만큼 그 레시피도 수만 가지인데 내가 처음 익혀 자주 만든 빵은 카스텔라에 가까운 빵이었다. ‘내 빵은 카스텔라다’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이유는 흔히 떠올리는 그것과 맛과 모양이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스텔라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유는 레시피가 카스텔라와 흡사하기 때문인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시피의 큰 뼈대(혹은 원리)가 비슷하다고 할까? 레시피가 같다면 빵도 비슷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카스텔라의 원리로 만들었지만 카스텔라가 아닌 빵’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나는 밀가루 대신 냉동실 적재량을 줄이기 위해 잠든 미숫가루를 꺼낸다. 곡물가루라 밀가루가 가진 단점도 보완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지만 덕분에 빵은 ‘폭신폭신’이 아니라 ‘퍽퍽’이 된다. 보통 음식 할 때보다 10배는 넘는 설탕을 쏟아부어야 할 때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 정도가 심할 때는 올리고당이나 꿀을 넣는다. 덕분에 내 빵은 더 질척거린다. 버터는 좀 나은데 버터가 없을 때는 식용유를 붓는다. 식용유는 죄책감의 정도가 설탕보다 더 크지만 대체품이 없기 때문에 그냥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다. 빵에서 기름기가 빠지면 '퍽퍽'과 '질척'의 정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해져 결국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베이킹파우더는 있어도 잘 쓰지 않는다. 어차피 올바르지 않은 빵, 부푼 정도는 맛에 그다지 영향이 없다. 그래도 머랭만큼은 단단하게 제대로 치는데 이는 작은 전동 거품기 덕분이다. 반죽을 만들 때 내가 제일 재밌어하는 과정이다. 투명한 달걀흰자가 설탕을 만나 회오리치면 부피가 커지면서 새하얀 크림 덩어리가 되는 과정은 정말 마법 같다. 엉터리 카스텔라 빵 반죽을 유산지를 깐 팬에 부으면 동심원을 그리며 퍼진다. 반죽에서 공기가 빠지도록 팬을 바닥에 대고 탁탁 치는데 이때 나는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말도 안 되는 주문을 건다.
갈지자를 그리며 비틀비틀 걸어 놓고는 걸어온 흔적이 곧길 바라는 사기꾼의 심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바르게 걷는 빵은 ‘사랑하는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라는 원칙을 깨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바르지 않지만 내 원칙은 최대한 지킨 착한 반죽이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라 ‘지반죽이면 감빵’이 되기를 오븐에 넣기 전 간절히 바란다.
스무 번 구우면 한 번 정도는 ‘반죽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빵’이 나타났다. 열아홉 번은 누가 봐도 엉터리 빵이었다. 엉성한 레시피도 할 때마다 달랐으니 엉뚱한 빵도 매번 같지 않았다. 그래도 반죽이 익는 동안 공기를 채우는 달큼한 냄새와 오븐 앞에서 변하는 모습을 계속 들여다보는 나는 즐거웠다. 도저히 못 먹는 빵은 버리기도 했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대부분 맛있게 먹었다(아니, 엄마의 강압에 먹어 주었다).
“내 빵은 파는 빵과 달라. 건강한 빵이라고. 엄마가 제빵학원 다녀봐서 알잖아. 사실은 엄청난 설탕과 첨가물이 들어가야 한다고. 맛은 없지만 착한 빵이야.”
질끈 눈을 감고 식용유를 부었으며 설탕도 평소 먹는 요리보다 많이 넣었으니 내 입으로 착하다 말하기 양심에 찔린다. 사실은 맛없다고 외면당할까 봐 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말이다. 절대 권력의 엄마가 이렇게 길들이니 가족은 빵을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엉터리 빵으로 길들인 탓에 가족들은 정말 맛있는 표정을 지으며 내 빵을 먹다가도 빵집에 가면 아주 그냥 환장을 했다.
오랜만에 빵을 구우며, 나는 이번에 여행할 도시의 유명한 빵집을 검색한다. A빵집은 단팥빵이 훌륭하고, B빵집은 소보로란다. C 빵집에 가면 커피와 스콘을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 하니 나는 기필코 이 곳으로 가족들을 끌고 가리라. 말 그대로 빵지 투어다.
가족들에게는 건강한 빵을 먹이려고 기를 쓰면서 나는 맛있는 빵을 먹고 싶은, 엉터리 반죽을 만들어 놓고 맛있는 빵이 되기를 기도하는, 빵을 제대로 배워봤지만 제대로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여행지에서 밥집보다 빵집을 먼저 검색하는, 맛있는 빵 앞에서는 맛 평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뺏기는 나는 그런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