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의 플랏메이트와 고등어 케밥
Istanbul, Turkiye 2011
Istanbul, Turkiye 2011
2010년 인천의 대학가 술집에서 파리에서 온 교환학생 아노를 방문하러 온 아노 친구 마리, 마리 친구 창수를 만났을 때, 창수가 튀르키예식 여자 이름이라는 것을 듣고 나는 형제나라인 한국과 튀르키예, 그들의 언어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했다. 너의 이름이 한국 이름으로도 들린다고, 남자의 이름으로 주로 쓰이는 걸 봤다고 말해줬더니 그도 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얼마나 흥미로운 언어들이니."
아노와 마리는 프랑스에서 건축을 전공하는 같은 학년의 친한 친구였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할 때, 아노는 한국을, 마리는 튀르키예를 선택했다. 누가 잘 되나 보자 하면서 긴 포옹을 했다. 그 포옹이 일 년쯤 지났을 때, 마리가 튀르키예에서 친구를 데리고 아노가 있는 한국으로 놀러 왔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만난 서로의 반 친구를 대동한 술자리였다. 2010년 나와 창수는 그렇게 만났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인천에서 시작된 이 인연이 23년까지 이어질 줄은 아직 몰랐지만.
크로아티아 자그라브에서 비행기를 타고 창수와 마리를 만나러 이스탄불에 갔다. 창수가 평소 좋아하던 모닝글로리 다이어리와 마리가 좋아할 녹차를 한국에서 미리 챙겼다. 그러나 집에는 그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 플랫 메이트인 같은 학교 학생인 그는 아이수라고 했다. 튀르키예 여성의 이름의 끝에는 '수'가 한국 여성 이름의 '영'처럼 많이 붙었다. 보통의 대학생은 가난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또 가난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쯤은 받아들여야 하므로 셋은 거실을 포기하고 그것을 집의 3번째 가장 큰 방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가장 사적공간에 대한 욕심이 없는 아이수가 큰 방을 쓰기로 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셋이 함께 떠들고 티브이를 봐야 한다면 아이수의 방이 거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친절하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과 이스탄불의 아파트에서 함께 며칠을 지내게 된 설렘도 잠시, 나는 이스탄불에 도착한 날부터 심한 고양이 털 알레르기와 개 털 알레르기 반응에 컨디션이 무너졌다. 여기 이스탄불에서는 길거리, 가게, 집집마다, 지붕마다 평화롭게 자신의 자리를 점찍어 두고 낮잠을 자거나 일광욕을 하는 동물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럼 나는 '오구오구' 하면서 엄마 미소를 짓다가도 재채기를 연달아 다섯 번 이상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나를 위해 마리가 자신의 방을 내어주고 자신은 (거의) 공동의 방이 된 아이수의 방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나는 알레르기 약을 끊임없이 먹으며 코가 머드팩을 씻어내기 전의 바싹 말라버린 이마처럼 건조해졌다가, 세탁기 안에 들어갔다 나온 솜인형처럼 끝이 없이 물이 떨어지는 축축해지는, 극단적인 상태로, 비몽사몽간에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약에 절어 쭈글이가 된 나를,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이 커다란 친구들은, 사랑으로 극진히 보살폈다. 창수는 닭과 쌀, 다진 채소를 통 파프리카 안에 넣고 육수가 다 없어지도록 삶아 찌는 'Stuffed Paprika'를 만들어 주었고 마리는 치아시드가 들어간 레몬 케이크를 막힌 코로도 맡을 수 있도록 고소하고 달게 구웠다. 레몬 케이크와 함께 마실 수 있도록 아이수는 진한 튀르키예식 커피를 끓여, 레몬 꿀차와 함께 내어줬다. 그리고 깨달았다. 터키는 자매의 나라였던 것이다.
내가 점점 기운을 차리자 마리가 자신이 이스탄불에서 정말 좋아하는 건축물이라 소개해준 현대미술관을 함께 가기로 했다. 이스탄불까지 와서 침대에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고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고. 기대치 않았던 이 미술관에서 정말로 좋은 작품들도 많이 봤는데 이것은 내 컴퓨터 사진 폴더에 '2011 터키 미술관'이란 폴더가 생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약 기운이 떨어지자 숨을 쉴 때마다 코에 불이 나는 것 같더니 다시 기관지가 콧물로 가득 차, 입으로 쉬느라 숨을 헐떡거렸다. 아직 한 달 남은 여정을 여기서 멈춰야 하나 싶을 정도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작품들 너무 좋다. 너무 좋고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어서 그 작은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었다. 겨우 도달한 특별 전시장의 끝에서 갑자기 진짜 맛있는 고등어 케밥을 먹으러 가자고 마리가 말했을 때 난 두 귀를 의심했다. 고등어? 케밥? 고등어 케밥? 오 마이 자매님... 마리 자매도 곧 교환학생을 끝내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에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고등어와 내가 아는 케밥이 서로를 노려보며 내 머릿속에서 싸움을 벌였다.
"마리, 정말 미안하지만 나 정말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춥다물, 많이 아프구나. 알았어 그럼 집으로 곧장 가자.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서 먹고 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아 집에 가는 버스가 그 항구 쪽을 거쳐서 가는 거야? 그럼 우리 고등어 케밥을 포장해서 바로 집으로 가자."
이렇게 알레르기반응에 져 한시바삐 집으로 가고자 하는 나와, 파리로 돌아가기 전, 다시 고등어 케밥을 먹어야겠는 마리의 협상이 중간에서 만났다. 항구 쪽에 있다는 고등어 케밥 트럭을 찾아 항구 근처에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거기가 어딘 지 한번 보였다. 지상에는 사람들, 상공에는 갈매기들이 그 주변에 돔 같은 막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막혔던 코가 다시 뚫리고 있었다. 뜨끈뜨끈하고 고소한 고등어 숯불구이 같은 향이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 향과 춤을 추며 코안으로 들어왔다. 내 축축한 코가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뭔가 익숙한데 처음 맡아보는 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매섭게 노려보는 갈매기들. 얼굴이 안 보이는 새하얀 연기안에 케밥 트럭 아저씨. 뭐지. 이 기분. 냄새와 정보로 가득한 정신없는 내 속을 알리가 없는 마리가 부리나케 포장한 두 개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발길을 돌렸다.
"힘들지? 빨리 가자."
"마리, 잠깐만."
"왜 그래? 다음 버스 곧 올 텐데."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저기 앉아서 먹고 가자."
고등어 케밥, 갓 만든 따뜻한 고등어 케밥이었다. 고향집에 가면 마당에서 아버지가 숯불 열기에 자글자글 튀겨 주던 고등어. 기름이 숯불 위로 떨어져서 퐈아- 하고 튀어 올랐다가 사그라들고 눈이 매운 연기가 끝없이 피어 올라, 연기에 튀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 바삭하고 촉촉한 고등어 맛이 빵과 채소와 향신료 사이에서 강하게 올라왔다. 이곳은 부모의 나라였단 말인가? 고향집에서 먹던 고등어구이 맛이 첨가된 케밥이라니. 나는 저 고등어 케밥을 먹고, 쓰러졌던 황소가 낙지를 먹은 것처럼 우뚝 일어섰다.
"마리. 여기 데려와줘서 너무 고마워. 처음 먹어보는 맛있데 왠지 내가 알고 있던 맛이야. 너무 맛있어. 내가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방금 이걸 먹고 알게 됐어. 그리고 다 나은 것 같아"
"나도 그 생각했었는데. 나 프랑스 음식 먹고 싶을 때 이거 먹고 프랑스에서 먹던 생선 요리가 생각났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인데도 말이야."
이스탄불의 사진은 그 고등어 케밥을 먹었던 항구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체한다,는 변명이고, 누워만 있던 터라 집 내부의 사진이 정말 하나도 없다. 대신 나는 자매와 형제와 부모의 나라에서 목격한, 대단한 전시로 채워진 '2011 터키 미술관' 폴더, 크게 감명받은, 터키식 스터프드 파프리카 요리법, 레몬 케이크 만드는 법, 제일 맛있는 터키쉬 딜라이트 고르는 법이 적힌 노트, 심하게 앓아누웠던, 아파트의 평면도의 기억과 함께 돌아왔다. 놀랍게도, 12년이 지난 현재 나와 창수는 같은 나라 영국에서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페스코테리언이 된 지금 나는 아직 그 고등어 케밥을 생각한다.
2022년 여름, 남편의 회사 동료를 회사 파티에서 만났다. 이스탄불에서 왔다고 했다.
"오, 나도 친구가 이스탄불에서 얼마 전에 영국의 어느 대학교의 건축과 교수로 왔어."
"혹시 창수?"
"왓더...??"
그렇게 나는 11년 후에 런던의 펍에서 창수의 대학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렇다. 그곳은 형제의, 자매의, 부모의, 친구의 나라였던 것이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할 때 그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친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