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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Oct 25. 2023

엠마의 집 a

화장실 따로, 욕실 따로

 London, England 2011


 2023년에도 나는 여전히 여행을 가서 세계 각지에 엽서를 보내는 사람이지만 201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취미는 제약을 약간 즐기며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이는 2010년에도 귀했기 때문에 엠마가 자신도 엽서 쓰고 우표 붙여서 부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나는 반가워서 엠마를 얼싸안았다. 그가 도쿄에서 인턴쉽을 끝내고, 서울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만났는데, 안동 하회마을로 여행을 같이 하게 되면서 정말 빠르게 가까워졌다. 엠마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날 우리는 서울의 술집에서 눈물의 이별을 한다. '내가 꼭 엽서 보낼게' 우리는 그렇게 1990년이 아닌, 2010년에 펜팔 친구가 됐다. 그 영국의 펜팔 친구에게 내가, 대학 마지막 학기로 복학하기 전에 2달 동안 홀로 유럽배낭여행을 떠날 것이며, 영국 런던도 포함되어 있으니 우리는 당연히 만나야 한다는 것을 엽서로 통보했을 때, 엠마는 이렇게 고마운 메시지를 보냈다.

    [런던에 온다면 우리 집에서 자! 친구들과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다들 정말 친절해. 그리고 우리 집에 거대한 소파가 있거든. 말 그대로 거! 대! 한!]


이 집에서는 엠마(bedroom1)는 이지(bedroom2), 아만다(bedroom3)라는 2명의 플랏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었다. 런던의 아파트 월세가 보통 200만 원이 넘기 때문에 학생이라면 세명, 네 명이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말 운 좋게, 내가 머무는 5일 동안 그중의 한 명, 이지가 런던 외곽에 있는 부모님 댁을 방문할 계획이어서 내가 이지 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플랏 메이트들은 종종 품앗이처럼 가능할 때, 자신의 방을 내어주거나 제 친구를 남의 방에 재웠다. 그중에 한 명이 침대 밑에 비밀 재떨이를 만들어 침대 매트리스가 까맣게 타고 집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진을 찍은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음

 이 평면은 유럽에서 자주 보이는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되어 있는 방식이다. 보통의 평범한 집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이 플랏처럼 화장실에 달랑 변기만 있는 경우에는 용변 후 손을 씻을 곳이 없어서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으러 다시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 정말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활동시간이 비슷한 3명의 플랏메이트가 함께 산다면? 정말 너무너무 고마운 평면이었다.

 누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분리 된 화장실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9시까지 등교해야 하는 대학생들에게는 준비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감사한 일이다. 물론 화장실에 세면대가 같이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이 플랏은 달랑 변기만 덩그란히 있었다. 그래서 아만다가 끝이 없는 긴 샤워를 하는 사이, 화장실을 갔다가 손을 못 씻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주방 싱크대에서 팔꿈치로 물을 틀어 손을 씻다 보면 엠마가 주방으로 들어온다.

    "아 나도 얼른 샤워해야 하는데. 쟤 진짜 오래 걸리네. 애들이 곧 들이닥치기 전에 일단 차 한잔 해야겠다"


 거실에 햇볕이 쏴-아 하고 들어오는 낮시간에 거실에서 우리는 차를 정말 많이 마셨다. 진한 홍차에 우유를 섞는 영국식 차였다. 얘네들은 아침이라서, 오후 4시라서, 숙취가 있어서, 출출해서, 심심해서, 혹은 그냥 차를 마셨다. 친구들이 주말 2시에 놀러 와서 3시간 동안 술이 아닌, 차를 마시며 비스킷을 먹다가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이런 차 쳐돌이들의 집에서 술파티가 열린다고 했다. 엠마와 그의 친구들의 집에서 왕세자 윌리엄과 왕세자비 케이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여는 (사실은 술 마실 구실을 만드려고 여는) 파티였다. 버스를 하루 종일 빌려 타고 다니면서 낮 12시에 시작해 총 10군데의 집으로 이동해 버스가 정차하는 30분 동안 그 집에서 술을 마시는 익스트림 버스 투어 파티다. 당연히 뒤로 갈수록 인원이 점점 늘어나고 집집마다 셀 수 없는 종류의 술을 섞어 대접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하나같이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엠마의 집은 4번째 집으로, 우리는 아직 낮 2시인 점을 감안해, 저렴하게 술과 음식을 함께 처리하는 최고의 방식, 보드카 젤리를 준비했다. LP 플레이어로 재생되는 다프트 펑크 노래가 거대한 모돈트 빈티지 스피커를 통해 크게 들리고 보드카 젤리가 준비된 이 거실에, 2시 10분이 되자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새떼처럼 떠밀려 들어왔다. 평면도의 남쪽 중앙, 폭 1M도 안 되는 작은 발코니에 4-5명이 매달려 담배를 피우면서 낄낄 대던 모습은 대학생 시절에 응당 있어야 할 어리석고 재밌는 추억이다. 그때 먹었던 끔찍한 체리 보드카 젤리의 맛도 잊을 수가 없는데, 5년 후 런던에 다시 살러갈 것이고, 오래된 펜팔 친구와 플랏메이트가 될 것이며, 그 새로운 집 거실에서 LP플레이어와 거대한 모돈트 스피커와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그때의 체리맛 보드카 젤리에 잔뜩 취해 있던 나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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