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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Oct 31. 2023

엠마의 집 b

엔 스윗(en suite)방과 존재하지 않는 방

London, England 2016 


 영국 워킹홀리데이에 선발된 날 엠마한테 먼저 알렸다. 영국에 2년 동안 살러 갈 거라고. 엠마가 다시 답장했다. 집은 구했냐고, 구하기 전까지 우리 집 거실에 자도 된다고, 다들 친절하고 거대한 소파도 있다고. 왜 엠마의 집엔 항상 거대한 거실과 거대한 소파가 친절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행이었다. 며칠 후 그래서 친구 집이 어디냐고 묻는 런던의 유학생이었던 친구에게 핸드폰을 꺼내 엠마가 보내 준 집주소를 보여 줬더니 정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 영국 친구 집이 쇼디치에 있다고?"


 런던에 도착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한인 택시를 미리 알아보고 예약했던 터라 택시를 타고 공항에서 이동했다. 기사님이 영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 토요일이라서 천만다행이네요. 주소 보니까 브릭레인 바로 옆이더라고요."  

 주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의 모습은 5년 전 영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엠마와 아만다와 함께 온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전에 없던 높은 빌딩이 들어섰다. 여기가 거기가 맞나? 뭐야 그 와중에 이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은. 하며 옛 생각에 젖어 창 밖으로 번지수를 찾고 있는데, 그라피티와 포스터와 스티커로 뒤덮인 귀신의 집 벽의 반이 거짓말처럼 열리더니 엠마의 얼굴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춥다물! 이 집이야. 문이 좀 찾기 힘들지?"

 런던 남쪽에서 거대한 소파와 거대한 스피커가 있는 집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살던 엠마는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던 소피와 아니타 그리고 샬롯이 살고 있던 이 런던 동쪽의 집 파티에 초대되어 왔다가 마침 그중 샬롯이 집을 사서 나가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는 집주인인 소피와 아니타가 술을 많이 마셔 완전히 취하기 전에 이 집이 너무 마음에 들고 너희들은 너무 멋지고 우리는 정말 재미있는 미래를 그려나갈 거라는 것을 어필한다. 엠마는 다음 달 이 믿을 수 없는 위치의 집에 더 말이 안 되는 월세를 약속받고 거대한 빈티지 모돈트 스피커와 함께 성공적으로 이사를 마쳤다.


 이 집은 쇼디치 오버그라운드 역 주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개발이 성황 하며 원주민들 모두가 떠날 때, 마지막까지 허물지 못한, 길게 '박힌 돌' 부지의 3층에 위치했다. 원래는 2 베드룸 플랏인데 거대한 거실이었던 것을 벽난로양쪽으로 벽을 쳐 세 번째 방(아니타의 방)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플랏메이트들은 2명 치의 월세를 3명이 나누어서 내는 천재적 방법으로 주변 시세의 70%에 해당하는 월세를 내면서, 천운을 가진 사회 초년생이 아니라면 살기 힘든 초역세권에 살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니타의 방이 좁고 방음이 잘 안 되는 형태라서 35%/35%/30%로 월세를 나눴고, 모두가 행복했다.  

사진 찍은 위치가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음

 유럽의 집 방 표기에 '엔 스윗(en suite)'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직통하는 화장실이나, 욕실이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안방 화장실 같은 곳이다. 어떤 곳은 욕실과 화장실이 같이 있고 어떤 곳은 둘 중에 하나만 있다. 소피의 방이 후자였는데 그중에서도 화장실만 있는 타입이었다. 이렇게 작지만 유용하게 나뉜 공간은 언제나 좋았다. 엠마 방 쪽으로 난 커다란 클로짓도 매우 유용해 보였다.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방'인 아니타의 방도 발코니가 있고 아늑했다. 거기에 여유로운 공용 욕실과 수납이 많아 편리하고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주방, 내 짐 때문에 어지럽혀 있지만 큰 거실까지. 얘네들은 어떤 전생을 살았길래 이런 완벽한 집에 그런 싼 월세를 내고 사는지 생각하게 되면서 나는 되려 비참해졌다.

 

 이 집에 도착했던 날부터 나는 10일을 더 머물렀다. 처음에는 거대한 소파에서 지내다가 소피가 일 때문에 며칠 집을 비우면서 소피 방에서 며칠 지낼 수도 있었다. 함께 이용하는 집에서 나만의 화장실을 갖게 되다니! 이 집에서 제일 좋은 방에서 지내는 소피는 방송 프로듀서였다. 이런 멋지고 흥미로운 여성들과 이 믿을 수 없는 집에서 영국생활을 시작한 덕에 내 영국생활이 점점 더 꼬이는 것 같았다. 방을 찾는 10일 동안 20군데 넘게 돌아다니면서 본 어떤 집도 저녁에 터덜터덜 돌아온 이 집보다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중심가에서 많이 떨어져 있으며 훨씬 작고 시설이 열악한데 월세가 두 배나 되는 것은 정말 절망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zone 1에서부터 생활을 시작하는 행운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크게 힘이 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집을 하루 종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완전히 지쳐 돌아온 나에게 방송 작가인 아니타가 말했다.

    "내가 이 집에 오기 전에 어떤 집에 살았는지 넌 알고 싶지도 않을 거야. 네 집, 네 타이밍이 올 거니까 좀만 더 버텨."

 어떤 비참함은 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힘을 내어 나는 너무 늦지 않게 이 집 소파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평일 아침 멋진 여성 3인방이 각자의 일터로 분주하게 떠나면 혼자 이 집에 남아 거실의 창문으로 밖을 종종 내다봤다. 그러면 오른쪽으로 브릭레인이 보였다. 일요일만 되면 이 집 근처로 놀러 온 사람들로 창 밖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렇게 두 번의 일요일을 창 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보내고 나는 내가 다시는 이런 곳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인생은 타이밍이고 게임은 끝나봐야 안다고 했던가? 나는 세 달 후 다시, 처음 오는 사람은 쉽게 문을 찾을 수 없고, 일요일이 되면 문 앞까지 사람과 가판대가 들어서는 쇼디치 역에서 1분 거리인 집, 그중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방' 아니타의 방으로 이사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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