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정사각형 평면
Stockholm, Sweden 2011
정사각형의 평면은 디자이너가 근사하게, 구성하기 가장 어려운 평면이다. 제약이 없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된달까? 건축주가 정사각형 안의 모든 가능성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으로 너무 많은 대안이 나오고, 텅 빈 도면을 그냥 두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의 직업병 때문에(본인 포함) 너무 과도하거나, 또 너무 휑 해져 버리기 딱 좋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알기 전에도 나는 대문, 마당, 마루, 방들, 작은 마루들이 잘게 나눠져 있던, 내가 처음 태어나 살았던 한옥의 평면과는 너무 다른, 친구네 집 아파트들에 심하게 낯을 가렸다. 그 아파트 들은 하나같이 현관문만 열면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거대한 거실을 끝없이 보여 줬다. 떨리는 속마음을 감추려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전학 날, 친해지기도 전에 와락 내 팔에 팔짱을 껴버리는 넉살 좋은 친구처럼 반가운데 너무 불편했다. 이 오래된 나의 편견을 이 완전한 정사각형의 리니아의 (부모님) 집이 없애 주었다
리니아와 오후 3시 스톡홀름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출발하고 리니아는 스웨덴 보라스의 기숙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3시에 대합실 의자에 먼저 온 누군가 앉아있으면 늦게 온 사람이 알아서 찾는, 조금 대담한 약속을 했다. 그 때 나는 해외 로밍 없이 와이파이에만 의존해 여행하던 2011년의 대학생이었다. 바로 전 여행지 코펜하겐에서 히피들과 함께 생활한 나는 샤워다운 샤워를 하고 침대다운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빨리 리니아 집에 가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2시 30분에 도착한 나는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을 찾아 핸드폰을 든 오른손을 공중으로 뻗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카페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띠링띠링띠링 연달아 페이스북 메신저로 메시지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가던 길을 멈춰 방금 그 카페 출입문 근처로 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털썩 바닥에 앉았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여러 개의 메시지가 한 번에 오는 것은 좋은 일 일리가 없었다.
리니아:[나 기차가 연착이 됐어. 좀 늦을 것 같아. 20분 정도? 좀 기다려줘. 진짜 보고 싶어!!]
리니아:[오 마이갓. 다음 기차도 취소됐어. 지금 기차를 알아보고 있는데 메시지 보면 연락 줘!]
리니아:[도착했어?]
리니아:[연락 좀 줘! 나 오늘 출발 못 할 것 같아 오 마이갓!]
리니아:[다행히 오늘 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엄마, 아빠가 나 대신 마중가신대! 일 끝나고 6시까지 도착하실 것 같대.]
리니아:[너 역 어디쯤 인지 알려줄래?]
2시간의 엄중한 사태를 10초 안에 파악하고 리니아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리니아! 나. 지금 기차역 1층 대합실이야. 어떡해? 너 많이 기다려야겠네, 그래도 늦게라도 표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너무너무 고마워. 부모님이 나 알아보시겠지? 나. 지금 이런 모습이야!]
셀카를 찍어 보낸다. 전송 중, 전송 중. 전송 실패...
나:[사진이 안 가네, 인터넷이 느려. 나 아시안이니까 알아보시지 않으실까?]
리니아:[너 깜짝 놀랄걸. 네 또래의 한국계 스웨덴인이 얼마나 많은지?]
나:[정말? 나 160cm 되는, 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어두운 갈색 파마머리라고 전해드려 줘. 지금 청바지에 회색 바람막이에 주황색 산악용 노스페이스 가방 메고 있어! 짐은 그거 하나야]
앉아만 있어도 눈꺼풀이 감기는 와중에 잠에 들지 않으려고 역 대합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친구 부모님까지 동원된 마당에 까무룩 잠이 들어 연락을 놓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 혼잣말을 하며 핸드폰을 5초마다 보고 있으니 저리 멀리서 리니아의 말대로 정말 아시안처럼 보이는 한 여성분이 다가왔다. 그녀는 짙은 회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Hej,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
"아니 괜찮아. 물어봐줘서 고마워"
친절하고 지금 나에게 제일 말을 걸어주지 않았으면 하는, 갈색머리의 회색 바람막이를 입은 그와 짧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위층의 창문에서 아래를 심각하게 내려다보는 중년의 남성,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비슷한 옷을 입은, 아시아계 여성 2명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려운 수수께끼가 나타난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리니아 부모님이다!'
나는 바로 그중 중년여성에게서 리니아 코와 입매의 유래를 확인했다.
"저기 내 친구 부모님이 날 데리러 오신 것 같아. 물어봐 줘서 다시 한번 고마워! 안녕"
나는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등에 맨 주황색 등산가방을 몸 앞으로 돌려 위층 부부에게 보였다. 그제야 두 분이 활짝 웃으시며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2달 만에 엄마, 아빠를 타지에서 만난 것처럼 처음 보는 친구 부모님을 보고 말도 안 되게 왈칵 눈물이 차 올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돌음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면서 그 들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 눈을 얼른 훔쳤다. 회색 바람막이 소매에 눈물이 스미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이 생생한 스톡홀름 기차역에서의 리니아 부모님과 상봉 장면을 끝으로 내 스톡홀름의 기억은 다른 도시와 나라에 비해 확연히 초라하다. 이 집의 도면도 다른 집들과 달리 어느 곳에도 스케치된 것이 없었다. 2달의 유럽 배낭여행 중 매일매일 여행 일기를 쓰던 일과가 덴마크 페이지 뒤로 ‘2시 기차역 대합실 리니아 +66 ’이라고 시작되는 리니아의 전화번호 외엔 빈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 두 장후엔 다시 핀란드가 일기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왜 스웨덴에서만 일기를 쓰지 않았는지, 또 몇 장면 이외엔 기억이 없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코펜하겐에서 만난 변태의 기억을 지우려던 뇌가 날짜를 잘 못 맞춰 덴마크가 아닌 스웨덴 기억을 삭제시켰거나 변태가 운영하는 숙소에서 새벽 2시에 쫓겨난 것을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는, 걱정만 더할까 봐 말도 못 한 설움이 리니아 부모님을 만나고 사라져, 뇌가 편안해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 것,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조금씩 모두 다 일 가능성도 높은 것이, 첫 번째는 가설이고 두 번째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리니아 집에 도착한 나는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다가 잠이 들었다. 저녁 7시에! 리니아 엄마가 샤워하고 밥 먹으러 나오라고 차려주신 연어 구이와 보리샐러드도 먹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야 한국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던 리니아와 1년 만에 만났을 때는 이미 19시간이 지나있었다.
처음 리니아 집에 도착해서 평면이 정사각형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도면 오른쪽 아래 코너에 위치 한 무빙월이 있는 다이닝 룸 때문이었다. 저 벽은 저녁엔 닫혀있고 아침엔 열리는 마법의 문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그래서 리니아 부모님이 'bedroom 2'로 나를 안내해 주시고 샤워실을 보여주실 때 '닫혀 있던' 저 '방'에서 리니아가 자겠구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엔 그 방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건축을 전공한 후에 어떤 건물에 들어가면 대충의 평면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데 아침에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데 그 도면 중 방 하나가 사라져 너무 당황스러웠다.
"리니아 넌 어디서 자는 거야?"
"나? 거실 소파에서"
"뭐라고? 내가 소파에서 자야지! 저기 세탁실 옆에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난 네가 거기서 자는 줄 알았어!"
"괜찮아. 네가 여행 중이라 피곤할 것 같아서 내 방 침대에 재워달라고 엄마한테 얘기했어. 네가 봤던 방은 아침이 되면 사라져.(웃음) 사실은 벽장으로 들어가는 무빙월이 있어. 아빠가 심심하면 그걸 열었다 닫았다 해. 내가 보여줄게."
이 현대식 아파트는 정사각형 평면 중앙에 섬처럼 욕실과 세탁실, 샤워실이 있다. 주방과 거실을 뺀 다른 공간은 조금 작나 싶었는데 막상 사용해 보면 딱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있었다. 거대한 거실에도 가구는 많지 않지만 길게 남쪽으로 난 발코니 때문에 어느 공간에서도 좋은 뷰가 보여서 어디서든 편안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dining room이 막혀 있지 않기 때문에 bedroom1까지 깊숙히 남쪽의 빛이 든다. 저 따뜻한 공간에서 리니아의 전 남자 친구 얘기, 스웨덴으로 대거 입양된 80년대 생의 한국의 입양아들 이야기, 덴마크 변태, 폴란드의 예쁜 공원 같은 얘기를 하느라 사진을 하나도 찍지 못한 것이 정말 황망하고 재밌다. 그래서 리니아의 집에서 찍은 단 하나의 사진은 바로, 나중에 식물을 토분에 키워야지, 생각하며 발코니 한쪽의 화분들을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