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치 서핑
Copenhagen, Denmark 2011
초인종을 누르고 미안한 얼굴을 하고 들어서니 입술이 붉게 물든 빅터가 문을 열었다.
“어서와, 드디어 왔구나. 어... 조나단도 왔네.”
“와인을 마시고 있었던 거야?”
그나마 가져갔던 내 미안한 얼굴은 여기서 사라졌을 것이다. 당혹스러움에 내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 급히 가야한다며?”
“아, 이제 안 가도 돼. 너희도 와인 마실래? 어떻게, 조나단은 버스를 다시 타고 가야하지 않아?”
“응. 좀 있다가 가지 뭐. 괜찮지?”
“뭐 그래. 야간 버스가 다니니까.”
일단 젖은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다. 머리를 후루룩 털며 이제 진짜 무슨 일인가 계속 물어본다. 그는 시작과 끝이 자꾸 달라지는 이야기를 지어내더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는지 자기가 떠나고 플로팅 아일랜드에서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봤는지 어것저것 심문같은 것을 했다. 화가 치밀었던 것도 잠시 빅터가 따라 준 와인을 몇 잔 마시니 어쩐지 긴장됐던 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여름 날씨였지만 비에 홀딱 젖은 채 몇시간을 밖에서 보낸 터였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갑자기 빅터가 잔에 남은 와인을 원샷 했다.
“흠아. 조금 졸리네. 난 이제 자야겠어. 조나단은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리고 윤주는 내 방에서 자. 아이들은 이미 잠들었으니.”
“뭐라고?”
나보다 먼저 조나단이 대답했다. 다행이다. 이상한 말이 맞구나. 나는 이제 싫다고도 말할 수 있어.
“아니 난 그러지 않을거야.”
"왜?"
"나는 너와 한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아."
“그럼 어디서 잔다는 거야? 소파에서는 잘 수 없어.”
“소파에서 재워주겠다고 네가 수락했잖아. 이제 와서 잘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넌 비에 홀딱 젖어서 안 돼.”
“샤워하고 잘게.”
“여기서는 밤 늦게 샤워하면 안돼.”
“씨발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지금 네 방에서 같이 자자는 거야?”
“목소리 낮춰. 애들 깨잖아. 그래. 네 방에서 같이 자지 않으면 지금 당장 짐 싸서 나가야 할 거야.”
“헤이. 빅터. 너 지금 취했어?”
“아니 난 취하지 않았어. 그리고 조나단 너도 이제 가줬으면 좋겠어.”
빅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내 짐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왜 그게 거기에서 나오는 걸까. 이게 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거였다면, 조나단이 같이 와 주지 않았으면, 그래서 그렇게 집으로 오라고 안달복달했던 거였다면.
“헤이, 은주!”
정신이 든 내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담배 하나 일단 피자. 빅터 우리 담배 펴도 돼?”
“베란다에 나가서 펴.”
베란다로 나와서도 이 상황을 소화시킬 수 없어 얼이 빠져있는 내가 조나단한테 물었다. 근데 내가 지금 들은 말이 맞는 건지 언제까지 남한테 물어봐야할까.
“응 맞아. 자기랑 섹스 안 할거면 나가라는 거 잖아. 빅터한테 이상한 소문이 있긴 했는데, 진짜 변태일 줄은 몰랐어.”
조나단이 두 개의 담배에 동시에 불을 붙인 다음 하나를 나한테 건냈다.
“너 지금 떨고 있어.”
“내가?”
“응 그것도 아주 많이.”
불이 붙은 담배 끝을 바라봤다. 어둠속에서 빨간 불이 일률적이지 않은 원을 그리고 있다.
“그러네. 씨발. 왜 이러지.”
“왜냐니. 방금 지금 누가 널 강간하려고 했잖아. 지금 우리는 이집을 무사히 나가야 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짐 다 챙겨. 근데 아까부터 안 보이던 네 핸드폰은 도대체 어디있는 거야?”
정신을 조금 차리려고 내 기억 속의 ‘코펜하겐’ 방을 열었다. 이 집에 들어와서 부터. 레고 부스러기, 아니아니 내 가방, 내 세면 도구들, 내 신발, 내 텀블러의 마지막 사용 장소로 하나하나 더듬어 찾아갔다. 생각나는 것은 다 챙긴 것 같다. 핸드폰만 빼고.
“조나단 내 번호로 전화 좀 해줘. 나 핸드폰을 찾을 수가 없어.”
“나 배터리가 없는데.”
베란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어떻게 할거야?”
“지금 짐 챙겨서 나갈게. 근데 그 전에 내 전화로 한 번만 전화해줘.”
“싫어. 네가 알아서 찾아서 가. 지금 못 찾으면 내일 날 밝으면 다시 찾으러 오던지.”
조나단과 나는 얼굴을 마주 봤다. 조나단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이 때 내 표정은 어땠을까.
“그냥 가자. 핸드폰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배낭여행이 2주나 더 남았다고. 난 핸드폰 없이 여행할 배짱은 없고, 다시 살 돈도 없으니까. 내가 무릎을 꿇었다.
“빅터 제발. 한번만, 제발 한번만 쓰게 해줘.”
빅터가 나를 보더니, 내 뒤에 조나단을 봤다. 이 때 조나단의 눈은 어떤 말을 하고 있었을까.
“하… 알았어. 한번만이야.”
나는 언제부터 흘렀는지 모르는 눈물을 닦고 빅터의 핸드폰을 받았다. 두 손이 너무 떨려서 번호를 누르기가 힘들지경이었다. 내 번호와 통화키를 누르고 온 에너지를 귀로 올려보냈다. 거실 소파 뒤 어디일까 먼저 다가가 봤지만 어디서 희미하게 살아나는 진동 소리는 그 쪽이 아니었다. 이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소리를 따라갔다. 비에 젖어 돌아온 뒤 나는 주방에 들어간 적이 없다. 물음표를 가득 안고 불 꺼진 주방으로 들어서니 전화기가 응애하고 지이이이잉- 더 크게 울기시작했던 것 같다. 번쩍 번쩍 불빛이 보인다. 싱크대 코너의 커다란 블랜더 뒤에서.
들고 있던 빅터의 핸드폰의 통화 종료를 눌렀다. 등골이 서늘해 지면서 모든 감각이 또렸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오래 입술을 물고 있었던지 입술이 얼얼했다. 내 핸드폰은 바로 주머니에 넣고 빅터의 전화기를 들고 나와서 거실에 뚱한 얼굴로 짝다리를 집고 있던 빅터에게 건냈다.
“고마워.”
그리고 조나단에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플로팅 아일랜드에 다시 도착하니 새벽 5시였다. 덴마트의 초여름의 짧은 밤이 끝나고 다시 아침이 환헀다. 돌아올지는 몰랐던 이곳에서 나는 스웨덴으로 넘어가기 전 1주일을 지냈다. 사람들내가 어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들으면 다들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낸, 예쁘게 잘 말려져 있는 마리화나를 권헀다. 그게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서 나는 매번 울었다. 그렇게 나는 플로팅 아일랜드, 운하방향에 버려진 잠수정에서 살았던 첫번째 아시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