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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Nov 01. 2023

스티븐의 집

불운의 집과 재밌는 할머니들

London, England 2016

 생각보다 집을 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엠마의 집 소파에서 집을 구할 때까지 계속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급한 불을 끄고 천천히 더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영국의 한인 정보 공유 홈페이지 04uk의 집 목록에 다행히 단기 렌트 게시글이 존재했다. 글쓴이는 자신은 집주인의 친구이며 홍콩계 영국인인 집주인은 2명의 여성 세입자를 구한다고 적혀있었다. 글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냈을 때, 홍콩계 영국인인 스티븐은 집이 비어있으니 지금 바로 보러 올 수 있겠냐고 영어로 답변했다. 나는 바로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 집에서 만난 스티븐은 이 집이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처음 샀던 집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생겨서 지금은 런던 외곽의 큰 집으로 이사 갔다고. 얼마 전에 집을 내놨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그동안 단기로 방을 임대하는 중이라며, 다행히 오늘 근처에 있었다고, 세입자 2명을 구하고 있고, 그것을 자신의 한국인 친구가 대신 광고를 해주었다고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한국인은 최고의 세입자야!"

    "아하, 그래"

 어떤 인종차별은 선망인지 혐오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데, '인종을 구별하여 대우한다'는 뜻을 다시 놓고 생각해 보니 실은 두 개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는 더블 침대가 있는 안방은 주당 £200이고 소파베드가 있는 거실은 주당 £150라고 했다. 그리고 근처 세인트 마틴에 입학했다는 여학생이 한 명 더 올 건데 내가 먼저 연락을 했으니 나에게 우선권을 주겠다고 선심을 베풀듯 말했다. 또 세탁기가 고장이 났는데 사람을 불렀으니 내일 올 거라고도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게시글에 나와있던 것처럼 물세 전기세를 추가로 내지 않는 게 맞는지 등등을 재차 확인하고, 조금 더 싼 거실을 2주 동안 빌리기로 결정했다.

 

 이틀 후 스티븐은 교외 집에서 런던으로 출발할 때 자기의 큰 차로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지난번 내가 쇼디치에서 이사를 할 것이고 이제 막 런던에 이사 와서 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고, 어차피 가는 길이라고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뜻밖의 호의가 의아했지만 쇼디치와 엔젤은 사실 가까워서 이상한 상황은 아니란 생각에 정말 고맙다고 배려를 덥석 물었다. 정말 친절하게도 짐까지 들어주고 그 짐을 거실에 내리고 그가 말했다. 세탁기 고치러 오는 사람이 오늘 못 올 것 같다고, 내일 오기로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거 때문이었구나. 나는 스티븐에게 2주 치 방 값 £300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중에 근처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할 테니 시간 되면 술 한잔하자고 소똥 같은 소리를 하는 그를 웃으며 내보내고서는 바로 이중 잠금 걸쇠를 걸어 잠갔다.

    "씨발놈이."

 소금을 뿌릴까 하다가 영국에서는 안 통하는 건가. 하고 대신 짐을 풀고 한동안 비어있던 집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일단 세탁기 고치는 사람은 안 올 것 같고, 바닥을 쓸고 닦고 거실 소파베드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며칠 후 안방에 들어오기로 했다던 세인트 마틴에 다니는 학생은 진짜 오는 건가 생각하며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가 휑한 거실이 낯설어 자꾸만 잠에서 깨어났다.


 3일이 지나서야, 세탁기 수리를 계속 미루던 스티븐이 근처에 세탁방이 있다며 거기를 이용해 달라고 미안해했다. 그래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세인트 마틴 학생이 갑자기 안 오기로 했다며 나에게 안방과 거실을 모두 다 써도 된다고, 허락과 같은 보상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난 세탁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근처의 세탁방에서 두어 번 빨래를 하고 돌아와야 했다. 다음 날은 또 욕조의 수도가 너무 뻑뻑해서 잠기지 않는 것이다. 물이 콸콸콸 나오는데, 잠기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이성이 마비되었다. 한국처럼 바닥에 배수구가 없는 건식의 영국 욕실의 욕조에서 넘쳐흐른 물은 내 머릿속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흘러나간다. 그때 세인트 마틴 학생이 갑자기 들어온다면? 내 머릿속에서 이 집은 이미 홍수경보였다. 나는 바로 밖으로 '헬프미이이이이이이' 를 외치며 뛰쳐나갔다. 다행히 계단을 내려오던 위층 신사가 끙끙대며 수도를 잠가 주었지만 그 신사가 손잡이가 너무 녹슨 것 같다며 주인에게 말하라고 하곤 떠나고 나서야, 욕조의 마개를 일단 빼고 시간을 벌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자괴감과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에 욕조에 들어가 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이 날 유체이탈 같은 끔찍한 가위에 눌렸다.


 이쯤 되니 이 집에 오면서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심신이 심란해진 나는 하루종일 거실 테이블에 앉아 오전 내내 빨리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오후부터 취직용 포트 폴리오를 밤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틈틈이 내가 지금 직장 때리치고 영국에 와서 뭐 하고 있지? 생각이 들 때마다 남향의 발코니로 나갔다. 이곳은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이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집이 안 보이는 곳. 에펠의 에펠탑 같은 곳.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없이 밖을 내다봤다. 철제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커피를 음미했던 곳. 그렇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숨통이 트이면 이제 재미있는 것들이 나타났다.

사진을 찍은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음

 빗속의 텅 빈 거리를 혼자서 활보하는 오렌지색 여우를 위에서 관찰하다가  휘익- 휘파람을 불면 깜짝 놀란 여우는 갈색 귀를 쫑긋이 세우고 주변을 훑다가 금방 4층 발코니의 나를 찾아낸다. 나에게 눈을 떼지 않고 꽃게가 걸어가듯 옆으로 총총총 뛰어간다. 그러다 나무에 콩 부딪혀 넘어진다. 화들짝 놀란 여우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달려 금방 정원사이로 사라진다. 그럼 나는 아이고 아프겠다. 하면서도 그 어리석은 귀여움에 반해버리는 것이다. 또 일주일에 두 번 해가 지면 맞은편 아파트 4층 복도에 백발의 할머니가 나타난다. 4층에서 신중히 조준하고 아래로 힘차게 쓰레기봉투를 던져 1층 공용 쓰레기 장에 골인시키던 그를 향해 처음으로 박수를 친다. 깜짝 놀란 그가 맞은편 발코니의 나를 찾아낸다. 그리고는 연극배우가 커튼콜에서 인사하듯, 한 손은 배 앞에 한 손은 공중으로 두 바퀴 돌려 올리며 여유 있게 답하는 것이다. 그는 내 쌍따봉을 뒤로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면 나도 웃으며 거실로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시작을 모르게 어떤 구덩이 중앙에 던져져 있을 때는, 구덩이를 나와서야 그 구덩이의 카테고리를 볼 수 있다. 그게 슬픔인지, 우울인지, 분노인지 또는 '복수 응답 가능'인지 말이다. 지금 내가 그 구덩이를 나와서야 살펴보고 있자니, 그 구덩이의 카테고리는 우울, 이름은 '스티븐 집의 저주'가 아닌, '런던으로 이사 3주째'이었다. 기억 속의 도면을 끄집어 내 보고 있으니 공간의 좋은 부분들도 이제는 보인다. 벽에 요철이 있어서 양쪽으로 이용 가능한 창고, 옷장을 계획해 유용하게 쓰였다. 벽체가 구조체인 경우에는 일자로 하는 것이 공정, 비용면에서 효율적이지만 오래된 굴뚝, 벽난로가 있어야 했던 유럽 주택 양식에서는 자연스러운 요철이었다. 북향인 주방에도 거실 쪽으로 고정창이 있어 남향의 빛이 깊이 들어오고 복도식 아파트라 남, 북으로 넓은 공용 정원도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주택은 아니었지만 혼자서 살기엔 더할 나위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이때 나는 중심가 중에서도 부유한 지역인 엔젤역에서, 월세가 200-300만 원 하는 아파트에 (온다던 다른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은 관계로) 2주간 54만 원 정도를 지불하고 전체 집을 혼자 사용하는 호사를 누린 것인데, 플러팅을 하는 집주인, 고장 난 세탁기를 고치러 올 거라는 헛소리를 믿었던 자괴감, 언제 올지 모르는 세인트 마틴 학생을 기다리는 긴장감, 넘칠 뻔했던 욕조 사태 들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채 구덩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런 구덩이 내의 경험들도 언젠가 그 쓰임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나 같은 경우엔 일주일에 한 번씩 꽤 자주 나타난다. 그건 바로 아파트 앞 빨래방에서 만난 러시아 할머니가 직접 보여주시며 러시아어로 알려준 침대 커버 접는 방식으로 침대 커버를 갤 때다. 그럼 항상 남편은 양말을 개다가 나를 경이롭게 바라보는데 그제야 나는 맞은편 아파트의 쓰레기 던지던 백발의 할머니처럼, 커튼콜을 하는 연극배우의 모습으로 멋있게 퇴장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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