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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Nov 13. 2023

레이첼의 집

윈도우 벤치와생일연차 

Southend-on-Sea,England 2017


    "엠마 너 이번 주말에 뭐 해? 전에 말했던 퍼릴라 갈래? 주말에 예약하려고 하는데"

    "나 친구들이랑 사우스엔드온씨에 자전거 여행 가기로 해서 안 되겠어. 미안. 근데 거긴 왜? 거기 비싼 데잖아.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어, 그렇구나, 아냐. 담에 가지 뭐."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있는 나에게 사색이 된 얼굴로 방에서 나온 엠마와 데미안이 다가와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너의 생일을 잊을 수가 있어?"

    "그러게 말이야.(웃음)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것 같네."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너를 사우스 엔드에 데리고 갈 거야."

    "갑자기? 안돼. 나 갑자기 연차를 낼 수는 없어."

    "안돼. 서른을 혼자 맞이할 수는 없어."

 이렇게 엎드려 절을 받아서 동행하게 된 여행지. 사우스엔드 온 씨. 내 삶은 사우스엔드 온 씨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사우스엔드 온 씨(Southend-on-Sea)는 런던에서 동쪽으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면 갈 수 있는 템즈강이 바다와 만나는 위치의 해안 도시이다. 기차를 싣을 수 있는 영국 기차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우리 5명의 개인 자전거를 싣고 가기로 했다. 시골에서의 기동력을 최대치로 높이기 위해서였다. 여행 전 짧게 이틀간의 작전 설명을 듣고 내 생일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퇴근 후 리버풀스트리트역으로 모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생일에 휴가를 쓴 5명 엠마와 데미안, 오렌 그리고 그들의 친구 마커스가 같이 가기로 한 여행이었다. 처음 보는 마커스가 나에게 어울리는 자전거라고 어색하지 않도록 나와 내 자전거를 동시에 반가워하는 근사한 인사를 건넸다. 어두운 런던의 차가운 저녁, 그 기차역에서, 따뜻한 마커스와 그 옆에 자전거를 끌고 아이들처럼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오렌과 데미안과 엠마의 얼굴을 봤을 때, 나는, 이 여행이 엄청나게 짧을 것이며 믿을 수 없게 재밌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데미안은 사우스엔드 온 씨의 대학원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친구들이 모처럼 놀러 온 주말에 에어비앤비에서 집을 하나 빌렸다. 원래 숙소 정보에 의하면 주인이 같이 살지만, 꼭대기층의 거실 하나, 방 하나, 욕실 하나, 주방 하나를 쓰는 방식이었는데, 웬일인지 기차역에 내려 자전거를 타고 찾아 간 집에서는 1층에 주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1층에 있는 주방은 사용할 수 없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우리는 그럼 요리하려고 가져온 치즈와 내일 마실 음료라도 냉장고에 넣게 해달라고 했다. 주인장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그는 그것이 매우 큰 부탁인 것처럼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사라졌고, 우리는 짧은 여행을 망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각자의 머릿속에서 아침을 어떻게 요리할지 차분하게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주인의 아들은 주방이 있었다가 없어진 데에 대한 떳떳권을 얻으려는 듯 나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못 마땅해했다. 당연히 우리는 1인의 숙박료를 더 지불하겠다고 미리 메시지를 보냈었고 그러라는 레이첼의 답장을 받았는 데도 말이다.

    “너네 엄마는 어디 계시니? “

    “어디 나가셨어.”

 친절한 레이첼과 조금 도움이 안 되는 아들의, 왜 나한테 이걸 시킨 건지, 넌 왜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는지 같은 고통스러운 전화 통화가 복도 끝에서 벽을 타고 들렸다. 통화가 끝나고 '엄마가 주방 사진이 에어비앤비에 올라가 있는 건 맞지만 주방을 쓸 수 있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던 건 유감스럽다. 그러니 이미 예약한 4인의 비용만 내고 지내게 해 주겠다’ 고 표정이 없는 아들이 전달했다. 혹이 되어 따라온 나 때문에 일이 수월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꼭대기 방으로 올라와 보니 주방은 사라진 것은 차치하더라도 모든 공간이 사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사진 찍은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음

 미리 사진을 보지 않은 나에게는 이 집은 사실 꽤 귀여웠다. 우리가 2박 3일 동안 지낼 이 집의 3층, 꼭대기 층은 박공지붕 바로 아래에 위치한 층이어서 양쪽으로 경사가 진 천장 중앙에서부터 내려오는 경사진 창문이 있었다. 직선벽과 경사벽이 만나는 지점을 두껍게 마감해 구조적으로 안정성을 높이고 그곳에 윈도우 벤치(window bench/nook, alcove)를 설치해 공간 편의성도 도모한 것이 사려 깊었다. 그러나 이 집을 예약한 엠마와 데미안은 그 집의 모든 사진들이 아주 말도 안 되게 왜곡되어 올라가 있고, 그중에 어떤 공간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에 큰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그들의 분노를 뒤로 하고 보면 중앙의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 방에는 퀸 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고 내 부에 작은 샤워실이 있었다. 양쪽이 경사지붕이라 불가피한 계획이었지만 상부장과 옷장에 문을 양쪽으로 달아 두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점도 좋았다. 그러나 거실에는 소파베드 1개와 리클라이너 1인용 소파가 있었고 그것이 4인용 숙소라는 조건을 억지스럽게 채우고 있었다. 집 구경을 하고 있는 내 뒤로 한 사람이 잘 공간이 없다고 엠마가 분개했다가 그럼 데미안이랑 나랑 같이

자야겠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나였다.

    "싫어, 징그러. 난 너희들과 셋이 한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아. 난 바닥에서 잘 수 있다니까, 나 한국사람인 거 잊었어?"

    "안돼. 너 30살 생일인데 바닥에서 자면 안 돼."

 어째서 30살이 되면서 안 되는 게 더 많아진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단호한 친구와 친구 남자친구와 셋이서 한 침대에서 나는 생일 아침을 맞았다.

   생일 아침에 옆에서 자는 엠마와 데미안을 깨지 않게 살금살금 일어나 혼자 조금 일찍 일어나서 해변을 달렸다. 나를 스치는 조깅하는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달리다가 조금 쉬었다가 조금 더 달리다가 천천히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현관문에 비치는 내 얼굴을 조금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게 내 30살의 이마구나. 행복한 29살의 마지막 저녁을 보낸 자의 볼이구나. 차고 빨갛구나. 이제야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난 친구들에게 차를 권했다. 거실에서 자고 있던 마커스와 오렌이 이불 안에서 몸을 최대한 움츠린 채 얼굴만 내밀고 말한다.

    "생일 축하해!"

 나는 윈도우 벤치에 쏙 들어가 앉아 차를 마셨다. 저 창가에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 쏙 들어가면 책도, 차도, 풍경도 모두 2배 맛있고 멋있어진다. 이 집의 가장 귀여운 부분으로 들어가 나는 뜨거운 김이 나는 차를 두 손으로 감싸고 창 밖으로 방금 잠깐 달리고 들어온 사우스 엔드 온 씨의 해안을 길게 바라보았다.


 조리가 필요 없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Two tree island에 하이킹을 갔다. 해안에 있는 갈대가 무성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일렬이 되어 자전거를 타고 함께 달리는 해안 도로의 풍경, 친절한 차들, 새소리, 갈대에 이는 스-윽 쓱 바람소리 모두가 내게 서른이 되어서 축하한다고 하는 듯이 느껴졌다. 나머지 11개월은 이렇게 마냥 행복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그래도 너는 서른의 첫날을 행복하고 따뜻하게 시작했지 않냐고.

 3시간의 라이딩 후에 들른 펍에서는 지역 양조장에서 만드는 IPA를 마셨다. 각자 다 다른 맛을 시켜서 마시는데 오렌이 자기 맥주가 너무 맛이 이상하다고 옆에 앉은 나더러 마셔보라고 했다. 마셔보니 김이 빠진, 시큼한 맛이 강한, 쓴맛도 강한 쎄션 IPA 맛이었다.

    "맛이 어때?"

    "이건 마치... '어제'의 맛 같아."

오렌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안에 남아 있던 맥주의 맛을 입술과 혀로 끌어모아 다시 한번 음미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와 맞아. 정확해."

 오렌의 필요이상으로 진지한 대답에 우리는 다 같이 크게 웃었다. 이어, 말도 안 된다며 엠마, 마커스, 데미안이 차례대로 오렌의 맥주를 맛보더니 다 같이 맞장구쳤다.

    "네 말이 맞네, ‘어제’ 같은 맛이네. 네가 서른이 되어서 그래. 이 맛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하다니."

    "얘 완전 서른이네."

    "누구도 너보다 이 맛을 그것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거야. 대단해."

Two tree island 가는 길 데미안, 엠마, 마커스, 오렌

 그 이후에 갔던 동네의 멋진 해산물 식당에서 먹은 해산물 스튜도, 너무 맛있다고 이름을 외우자 했지만 아무도 사진은 찍지 못한 화이트 와인도, 알딸딸하게 취해서 한적한 길을 해를 등지고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걸으며 얘기하며 돌아가던 길도 모두 선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바람이, 햇빛이 내 30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하루의 끝에 우리는 다시 레이첼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1층의 부엌을 지나치며 매번 들으라는 식으로,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농담을 하는 오렌의 등을 밀어 3층으로 올려 보냈다.

 시작이 좋지 않았던 이 공간에서도 우리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좋은 상황과 나쁜 상황은 있지만 나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을 함께 목격한 것이다.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웃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를 만들었던 이 집을 나오며, 나는 다음 생일이 오기까지 남은 11개월을 잘 지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고 망상도 할 수 있게 됐다.


    "일 년에 네 생일, 그 하루도 네 맘대로 하지 못한다면 네가 네 시간을 온전히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틀 전에 여행에 합류하게 된 내가 연차 내는 것을 걱정하자 엠마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음 날 갑자기 별다른 이유 없이 연차를 내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사우스엔드온씨에서 30살 생일 이후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이제 매년 생일연차를 내는 사람으로서, 내 시간을 온전히 관장하는 사람이 된 듯이 나는 일 년의 하루, 내 생일에 보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보낸다. 물론 회사는 그게 ‘생일연차’ 인지 알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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