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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물방울 Nov 14. 2019

조울증이지만, 참 행복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일어선 경험이 있나요?>


저는 절망 속에 갇히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우울의 늪이라는 절망은 참으로 외로웠어요. 어두운 구렁텅이 안에서 꼼짝없이 묶이면, 누군가 꺼내주어야 해요, 누군가 묶인 줄을 풀어줘야 해요. 구멍 안으로 밧줄을 내려주든, 손을 잡아 꺼내줘야 해요. 어두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어요. 심지어 아침에 이빨을 닦고, 세수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던 그 때. 일상생활 자체가 너무나 벅찼던 때가 있었죠. 그리고 이상한 세계에 속해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조용히 저와의 인연을 끊었죠. 그 때 저에게 따뜻한 손을 잡아준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제 손을 꼭 잡으며, 말했죠. "oo아, 나 너와 평생 친구할 꺼야" 잊을 수 없는 그 한 문장의 말. 비록 작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제 영혼 깊은 곳에 울림을 주었어요. 그 한마디는 저에게 빛이었죠. 존재가 부정당했던 세상에서 꺼내지는 기분이었어요. 전 더 이상 어두운 구렁텅이에 홀로 있는 외톨이가 아니었죠.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죠. 절망 속에서 스스로 일어선 경험은 없어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절망 속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거든요. 전 친구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으로 전해진 온기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어요. 아주 천천히 말이예요.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나요?>


제가 앞서서 우울의 늪에 빠졌다고 말씀드렸죠? 그 늪은 깊고 빠져 나오기 힘들어요. 강렬한 빛이 내리 쬐도, 마음의 문이 닫혀있기에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없죠. 마음의 문이 열리는 만큼 빛이 들어올 수 있죠. 처음에는 정말 바늘이 종이를 뚫은 것보다 더 작았던 것 같아요. 빛이 들어오는 마음의 통로가 말이예요. 제 인생의 운전대를 모두 놓아버렸었죠. 어떤게 옳고 그른지 혼란스러웠거든요. 저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적 사랑이었어요. 마음의 통로를 넓히는 방법은 그게 유일했죠.


제 마음의 통로가 열렸을까요? 누구를 통해 열렸을까요?


저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준건 바로 지금의 '신랑'이었어요. 나에게 ‘그냥 사랑해’라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 그런 신랑이 있었기에 제가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주섬주섬 해볼 수 있었지요. ‘도전’이란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이란 뜻이예요. 사실 전 그럴 용기는 없어서 ‘도전’이란 단어에 맞는 에세이는 아니지요. 진짜 절망의 늪에서는 도전하기 쉽지 않거든요. 허우적 대기도 바쁘니깐요. 사랑의 빛을 온전히 쐰 지금에서야 조금씩 도전하고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말이예요. 예를 들면, 글쓰기나 그리기 같은 활동을 말하는 거예요.


사실 ‘남’이었던 사람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는게 쉽게 납득이 안되실 수 있어요. 그럼 부모님은 사랑 안 해주셨나? 라는 의문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 이야기 해드릴께요. 물론 부모님도 절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시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꾸 조건적 사랑을 내세우세요. 살을 조금만 더 빼면 좋을텐데, 자기 일을 조금만 더 잘하면 될텐데, 아프지만 않으면 참 괜찮을텐데... 어떤 때는 불만족스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시고, 어떤 때는 화를 내세요. 그거 아세요? 이제는 예전처럼 많이 두렵지 않았어요. 아빠의 욕망 때문에 분출되는 화라는걸 깨달았거든요. 그 때 처음으로 경험했어요. 아빠의 ‘화’가 나의 ‘잘못’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요. 더 이상 아빠의 욕망에 맞춰서 절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살은 빼야해요. 제가 작은물방울이 필명인데, 몸집이 작지 않거든요. 그래도 지금 이상태 그대로  절 사랑하기로 결심했어요. 왜냐하면 전 소중한 존재거든요. 말이 길어졌는데, 더 이상 조건적인 사랑에 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엄마, 아빠의 사랑이 저에게 충분하지 않았던 이유랍니다.





<어떻게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나요?>


예전 신혼일 때 신랑에게 내가 좋은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어요. 아마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 할 때였을 꺼예요. 전 질문을 잘하니, 그날도 신랑에게 물었어요.


 "근데, 내가 왜 좋아?"


신랑의 진짜 진짜 제가 의외라고 생각하는 대답을 해 주었지요.


"첫째는 잘 먹어서 좋아. 그리고 둘째는 느려서 좋아!"


정말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첫 번째 이유는 엄마가 유독 싫어하는 저의 모습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아빠가 발견하는 저의 치명적 단점이었으니, 이 두 단점을 장점으로 봐 주는 신랑의 그 시선은 기적이었고, 따스한 빛이었죠.  (근데, 지금은 이 두 가지가 신랑에게도 단점일 수 있어요. 진짜 잘먹고, 진짜 느리거든요.)




제가 오랜 고민 끝에 정의한 행복은 바로 이거입니다.


존재 자체로 만족하는 것


제가 찾은 행복의 빛은 신랑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했어요. 그 사랑은 깜깜했던 저의 마음구멍을 조금씩 열어주었거든요.


 지금은 참 감사해요. 있는 그대로의 절 사랑할 수 있어서요. 부족해도, 많이 부족해도 조금씩 노력하고 있는 저여서 말이예요.









제가 행복을 다시 찾은 경험은 여기까지예요. 글은 여기서 끝나지만, 행복을 이어나가는 일은 결코 중단하지 않을 거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운 분이기 때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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