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로망

소설 같지 않은 소설 #1

by 작은물방울

2007년 8월 13일


"나 지난 토요일에 길가는 사람이 나에게 번호 물어봤어. 알려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팔 근육이 좀 있더라고. 나 또 근육있는 남자 좋아하잖어. 그래서, 끝번호만 빼고 알려줬어. 근데 연락이 오더라. 이따 보기로했어."


친구 예나이다. 또 헌팅당했다는 자랑질이다. 친하긴 하지만, 이런 은근한 말에 살짝 약이 오르기도 한다. 나는 모태솔로이고, 헌팅도 당한적이 한번도 없는데 말이다. 왜 예나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아니다 사실 알고 있다. 예나는 마르고, 매끈하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 다리도 얇아서 치마도 잘 어울리고, 그 높은 하이힐도 잘도 신고 다닌다. 그에 비해 난 좀 통통하다. 매끄럽긴 매한가지인데, 나는 조금 까무잡잡하다. 쌍커풀도 없고 코도 오똑하지 않다. 아냐. 이렇게 자기 비하하긴 싫은데, 난 매력이 없나보다.



2008년 2월 13일


내일 어학연수를 떠난다. 꿈의 나라 미국이다. 어렵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 교환학생으로 해외를 다녀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에게 역부족이었다. 영어는 어렸을 때부터 내 발목을 잡았다. 대기업이에 취직하려면 토익점수도 따야하고, 스피킹실력도 월등해야 했다. 중학교 내내 문법과 발음기호를 외웠지만, 결국 영어는 내 대학교등급도 두단계나 아래로 끌어내렷다. 더 이상 영어가 내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는 나의 설득 끝에, 부모님이 허락하셨다. 미국 중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가게 되었는데, 사실 많이 떨린다. 어딘가를 혼자 떠나본 건 처음이고, 혼자 어딘게에 떨어져 살아보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15일


피곤한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일단, 시내에 위치한 기숙사에 집을 풀고 길을 나섰다. 그냥 주변 동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물을 좀 사고 싶었다. 한 블럭을 걸었는데, 세상에나 나에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깅을 하는 멋진 흑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going" 난 더듬더듬 어학연수 오기전 배웠던 영어로 그냥 돌아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본심은 나의 핸드폰 번호를 달라는 거였다. 예나에게 있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처음으로, 그것도 외국 사람이 말이다. 난 핸드폰을 개통하지도 않았고, 이런 일이 처음이여서 당황해서 그냥 얼버무리고 다시 길을 걸었다. 근데, 이게 또 길을 얼마 가지 않아, 한 키가 크고 황금빛의 곱슬머리인 미국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How're you?" 난 "Fine Thank you, and you?" 라고 중학교 책에서 외운 대답 그대로를 해버렸다. 왜 물어봤는지.. 그냥 잘지낸다고 하고 말면 되었을 것을... 근데, 그 남자 미국인 또한 결국 내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았다. 두명이나 이런일이 있으니 황당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하고, 어쩔지 모르는 생각에 기숙사로 돌아왔다.



2008년 3월 15일


알았다. 알아버렸다. 나 여기서 진짜 예뻤던 거였다. 아니 진짜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헌팅을 당한다. 미국사람들이 그렇게 헌팅을 자주하는 건지 카페에서 물어봤는데, 그냥 너가 pretty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진짜 이상한거는, 어학연수를 하는 일본, 한국, 태국 등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난 전혀 예쁘지 않는데, 이상하게 미국, 유럽 사람들 안으로 들어오면 너무 예쁘단 말을 듣는다. 심지어 기숙사 홀에서 마주친 이탈리아에서 유학 온 여자애는 자기가 본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했다.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난 진짜 여기서 예쁘다.



2008년 4월 8일


날이 정말 좋다. 샌디에이고의 태양은 하늘의 축복임에 분명하다. 항상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이게 다 날씨 탓이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였다. 좋아진 나의 표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 버스에서 어떤 사람이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학교에서 여기까지 장장 30분동안 버스를 탔는데, 그 동안 내내 날 쳐다봤다. 눈을 어디 둬야할지 모르겠는데, 주변 사람들은 뭔가 안다는 느낌으로 날 흘끔흘끔 바라봤다. 사실 나도 필이 없진 않다. 하늘에서 떨어진 이상형을 보면 저렇게 얼어있을 수 있는건가? 이건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근데, 끝내 그 사람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바라만 봤다. 그럴꺼면 왜 쳐다봤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그다지 관심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지내냐고 말을 걸었다. 헌팅이 아니더래도 원래 미국인들은 말을 잘 건다. 나도 이제 그리 선입견으로 바라보진 않는다. 그냥 흥미로워서 말을 걸 수도 있으니까. 근데 지난주 화요일에 나를 봤다는거다. 아니 내가 화요일에 어디있었는지 나도 모르는데, 그걸 알고 있다는게 좀 신기하긴 했다. 나는 꽤나 유명인사인건가?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009년 1월 7일


눈이 내렸다. 난 한국에 돌아왔다. 꿈같이 달달했던 샌디에이고의 봄을 떠올린다. 딱 3개월만 있다오라는 부모님의 지원하에 난 딱 한 학기만 그곳에서 머물렀다. 너무도 아쉬웠던 시간이었다. 난 다시 꿈을 꾼다. 미국에 그것도 캘리포니아지역으로 기필코 가리라!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내가 미국에서 예뻤던 건 다름아닌 나의 통통함과 까무잡잡함이 통했던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썬텐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 '텐'(그을러진 피부)하다는 피부를 내가 가진것이다. 거기에 눈이 크고 쌍커풀이 없는게 매력 포인트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성형하지 않고도, 살을 빼지 않고도, 내가 예뻐질 수 있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게 너무도 신기했다. 그래서 예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말하면, '하하하하하'하고 웃는다. 그 웃음이 안 믿긴다는 웃음인지, 재미있다는 웃음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웃는다. 그래서 나도 겸연쩍게 미소를 짓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러면 예나는 내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 새로 생긴 남자친구이야기를 한다. 3살 연상인데, 람보르기니를 타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 뒤로 그다지 귀담에 듣지 않았다. 람보르기니 차체가 낮아서 타기 힘들었다는 둥 뭐 관심없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예나가 얄밉지만, 내심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2012년 2월 15일


난 지금 인천공항이다. 치열한 3년을 살았다. 돈을 벌면 영어에 많은 비용을 썼다. 나는 철저히 스펙을 쫓았다. 그리고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외국계회사에 이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지사로 발령 받게 되었다. 미국에 가면 어떠한 일도 마다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께서 회사를 통해서 안가면 절대 보낼 수 없다고 했다. 하긴 부모님 말이 맞기도 하다. 가서 카페에서 일하거나, 청소일을 해서 미국에 사는건 의미 없고 고생스러울 테니까. 그런 부모님의 말에 3년이란 긴 시간을 열심히 살았다. 마침내, 난 미국으로, 다시 샌디에이고로 떠난다.





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가?


내가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그 중에도 미국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서 난 미인이기 때문이다. 제발 나도 나 예쁘다는 곳에서 원없이 살고 싶었다. 기회의 땅 미국 그곳에서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그곳에서 난 예쁘니까, 아름다우니까, 내 삶도 아름다울 꺼야! 부푼 꿈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내년쯤엔 꼭 예나를 미국으로 부를 꺼고, 내가 미국에서 예쁘다는 걸 증명하고 말꺼다. 창밖으로 구름이 보인다. 내 몸이 구름위에 있다보다. 그보다 더 구름위를 둥둥 떠다니는건 내 마음이지 않나 싶다.





* 2012년 2월 15일을 현재로 설정하고 글을 썼습니다.

* 미래 이야기는 개개인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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