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나를 덮쳤다. 아주 옅고 파란색의 우울이었다. 일명 ‘코로나 블루’. 코로나 19 전염병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앗아갔다. 물론, 감염자들의 생사를 건 싸움, 의료진들의 병마와의 전쟁, 자영업자의 생계가 걸린 전투 등과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때에 따라 만나는 친구들과의 수다, 2주에 한 번은 만났던 오프라인 독서모임, 신랑과 떠나는 여행 등을 하지 못한 지 어언 두 달이 넘어간다. 최소한의 외출만을 하고, 실내 활동을 주로 했던 나. 뚜렷이 말할 수 없었지만 난 참으로 우울했다. 자꾸만 세상이 둔탁해졌다. 신나지가 않았다.
엄마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주로 단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 딸에게 밖에 못한다는 말을 덧 붙이셨다. 듣는 것 만으로 스트레스가 쌓었다. 감정은 쉽게 전이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생각하는 걸 보면, 또다시 우울이란 그림자가 나를 덮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번엔 말없이 그냥 그림을 그렸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글이나 말로 형상화하는 게 두려웠다. 내가 짊어진 부정적 감정의 무게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도 귀찮았다. 색이 주는 치유를 느껴보고 싶어 그린 추상화이다. 마음에 드는 색을 팔레트에서 찾는다. 적당한 크기의 붓을 골라 세로로 칠했다. 그렇게 한 줄 두줄 색으로 채워지는 흰 도화지를 보았다.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아니 힘들었던 감정의 표출이다. 어떤 사람은 우는 걸 극히도 싫어할지 모르지만, 난 눈물이 반가웠다. 눈에서 흐르는 뜨거움은 치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라색을. 황토색을, 노란색을 흰 도화지에 칠했다. 마음이 녹는다.
추상화_사회적 거리가 필요해
삐뚤빼뚤하지만, 각각의 색이 주는 희열을 느껴보았다. 자신의 색을 당당히 내보지만,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벚꽃 그림
코로나가 덮쳐도 봄은 온다. 바깥은 벚꽃이 한창이다. 그래서 그려본 벚꽃이 핀 언덕이다. 아마추어 느낌이 물씬 난다. 그래도 괜찮다. 산으로 들로 꽃길로 나들이 가고 싶은 날이 계속된다. 따스한 햇살에 꽃들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곳저곳에서 자신을 피워내는 꽃을 보고 싶지만, 지금은 잠시 참아야 한다. 코로나 19가 전국을 덮치지 않기 위해, 충분한 사회적 거리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맘껏 그려본다. 벚꽃이 흰 도화지에 피어난다. 한 잎 두 잎, 내 손에 든 붓이 지나는 자리마다 꽃이 피어난다.
보고싶은 봄 바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여행을 가지 않은지 꽤 되었다. 제주도나 강릉 등 파아랗고 시원한 바다를 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림이 있었다. 바닷소리를 ASMR로 유튜브로 틀고, 붓을 들어본다. 붓에 물을 묻혀, 파랗게 칠한다. 구름이 있는 하늘과 봄꽃에 피어있는 잔디는 덤이다. 방 한 구석에서 바다를 꿈꿔본다.
그림은 치유이고 힐링임에 분명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상태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정도의 상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말은 독이 될 수 있다. 상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의 글이 상대에게 어두운 그늘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의 그림이 나쁜 감정의 통로가 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럴 수 있을까?
한 바탕 쏟아내고 나니 지금은 숨이 차분해졌다. 바닷소리가 더 감미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그림과 글이구나 싶다.
코로나 19는 우리네 일상을 앗아갔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일어서야 한다. 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일상의 옅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집안에 있는 크레파스나 색연필 물감 등으로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걸 그려보면 어떨까 싶다. 유치하고 잘 못 그리면, 어떤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 손으로 창조해보는 재미가 색체가 하얀 도화지에 펼쳐지는 힐링이 찾아올 거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적을 맛보게 될 수 있으니까.
나에게 덮친 우울의 부정적 감정을 색으로 펼쳐보았다. 이 그림이 나에게 힐링이듯, 다른 이에게 힐링이 되기를 꿈꿔본다. 이 글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듯, 읽는 이에게 희망이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