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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아 Dec 30. 2021

여덟명의 남녀가 한 집에 산다

좋은 집을 완성하는 건 좋은 룸메이트

시트콤과 드라마에서 남녀가 한 집에 사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설레고, 재밌고, 하루도 심심할 틈이 없는 에피소드가 일상을 채운다. 실제로 살아보니 서로에게 남자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룸메이트이자 쉐어하우스 메이트로서의 덕목이 더 중요했다. 자기가 활동하고 난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함께 하고, 새벽 3시에 고성방가를 지르거나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첫 쉐어메이트 운이 좋았는지 좋은 사람들과 방과 집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함께 살만한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가장 가까이에서 친구가 되어주면서도 사생활을 존중했다. 4인실 방이었지만 다행히 거실과 공용 공간이 넓었다.


발코니와 공원과 공용 헬스장이 있는 집


몇 일 발품을 팔아 앞으로 살게 될 쉐어하우스를 구했다.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얼티모'라는 동네에 있는 '유닛'이었다. 얼티모는 시드니에 있는 지역이고, 유닛은 우리나라로 치면 연립 주택이나 빌라와 비슷한 주거 형태다. 집은 13평 정도 되었는데 부엌, 거실, 방 2개, 화장실 2개,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하엔 입주민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용 헬스장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과 똑같은 풍경이고 저 건물이 내가 룸메이트들과 살았던 '유닛'이다ㅣ출처:realestate.com.au


집 내부. 사진은 쉐어메이트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빈 집 사진. 거실과 부엌 | 출처:realestate.com.au
시드니 풍경이 보이는 발코니와 지하 헬스장| 출처:realestate.com.au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 학생들이 주로 사는 깨끗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이곳에서 서로 다른 국적의 남녀 8명이 함께 살았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 페루, 그리고 콜롬비아 출신으로 워홀을 온 사람도 있었고, 대학원생, 취업 비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딸을 보기 위해 잠깐 머물고 있는 중국인 아저씨와 필리핀에 있는 자식에게 돈을 부치며 일하고 있는 싱글맘도 있었다. 다들 공평하게 이층 침대 한 칸과 방의 수납장 한 칸, 냉장고 한 칸을 자기 공간으로 사용하고, 그 외 공간을 공유했다. 여덟 명이 사는 4인 1실 월세가 서울의 1인 가구 원룸과 비슷한 걸 생각하면 시드니의 가장 중심가에 산다는 건 엄청나게 비싼 일이었다.


매일 같이 오고 가는 여행객들과 지하에서 열리는 파티에 정신이 없던 호스텔과 비교해 쉐어하우스에 오니 비로소 집 같았다. 작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겨 물건들을 꺼내놓을 수 있게 되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사물함 자물쇠를 잠궜다 여는 일을 안해도 되었다. 같이 사는 사람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신뢰가 생기면서 물건을 잃어버릴 걱정이나 낯선 공간에서 생활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도 많이 줄었다. 아프거나 피곤한 날에는 방해 받지 않고 침대에서 오래 잠을 잘 수 있었고 다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아침에 출근, 저녁에 퇴근을 하는 패턴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생활에 질서가 잡혀갔다. 저녁엔 다들 쉬는 분위기였고 늦은 시간에 집에서 파티를 벌인다던가 하는 일은 잘 없었다. 룸메이트 중 한 명이 호텔리어로 일을 하면서 새벽 5시에 일어나길래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루틴을 잡았다. 마침 지하에 헬스장이 있어서 아침 운동을 시작했고, 시드니 도서관에 다니며 할 일을 해나갔고, 일상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이 집에서 시작했다.


같이 사는 데서 오는 당연한 불편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이 집은 유목 생활을 하며 거친 공용 주거 중에 가장 괜찮았다. 집 자체의 컨디션이 좋아서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좋았다. 일단 일본에서 온 두 명의 쉐어메이트는 청결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오사카 출신 남자인 켄은 매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설거지를 끝낸 접시나 식기구들을 깨끗한 행주로 물기를 닦아 선반 아래 수납장에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접시 닦는 행주를 매번 깨끗이 빨고 건조대에 돌려 개놓았다. 도쿄 여자인 히카루는 항상 반듯하게 자기 물건을 정리했고 화장실이든, 식탁이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깨끗하게 치워서 사용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콜롬비아 출신 친구는 자국에서 수학 선생님을 하다 호주에 와서 청소 일을 하고 있는데 화장실 청소에 진심이었다. 그 친구의 손길이 닿으면 세면대에서 빛이 나고 뽀득뽀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해졌다. 필리핀 친구는 요식업 일을 하고 있는데 매번 레인지 위에 호일을 깔아 놓고, 조리 기구들을 단정하게 정리해놓았다. 나도 서울 살이 10년차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열심히 집안 일에 가담했다. 매번 주말이 되면 집에 있는 사람들끼리 블루투스 스피커에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구역을 나눠 대청소를 했다.


공간을 나누고 일상을 함께 하는 사이


그중 오사카에서 온 '켄'이라는 친구와 가장 친해졌다. 가방 사건 때문이다. 켄은 일본에서 물리치료사로 일을 하다가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영어를 배우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켄은 영어를 막 배우고 있는 중이어서 늘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니며 번역기나 사전을 썼다. 어느날 켄이 뭔가를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배달 가방을 주문했는데 그게 한달째 안와. 그게 와야 배달 일을 시작할 수 있고 그 일을 해야 다음달 렌트를 낼 수가 있거든! 근데 고객 센터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혹시 나좀 도와줄 수 있어?"


켄은 이러한 내용을 구글 번역기와, 제스처와, 표정을 동원해 설명했다. 당장 다음달 렌트 걱정을 하는 대목에서 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도서관에 가려다가 가방을 내려 놓고 의자에 앉아서 켄의 얘길 들었다. 절박해보였다. 돕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겠다고 했다.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듣던 대로 호주의 행정 절차는 빠른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화를 걸어서 -> 엄청난 대기 신호를 기다렸다가 통화가 닿으면 ->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왜 켄이 아니라 내가 전화를 하는지 설명하고, 나는 누구인지 설명하고 -> 켄의 인적사항을 알려주고 -> 배달 관련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설명하면 -> 안내인이 느긋한 말투로 어떤 번호를 알려주며 여기에 문의를 하라고 알려줬다.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면 또 어떤 전화 번호를 알려주거나, 다른 담당자를 알려주는데 어느 누구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 가방을 받을 수 있는지 확실히 알려주지를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상담사는 내내 웃음이 섞인 느릿한 말투로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고는 10분 후에 돌아왔다.


몇 주가 지나서야 결국 켄은 지하철로 왕복 네 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 가서야 그 가방을 받을 수 있었다. 켄과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하다가, 한동안 투닥대다가, 결국 친해지게 됐다.


켄은 일본에서 올림픽이나 각종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 물리치료일을 도맡았다고 했다. 식단이나 운동, 몸의 구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고 새로운 환경에 온 김에 다이어트를 시작한 참이었다. 켄은 나의 운동과 다이어트를 도와줄테니 자기의 영어공부를 도와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메이트이자 운동 메이트가 되었고 켄은 내가 플랭크를 올바른 자세로 하는지, 식단에서 탄수화물과 지방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내는 것을 도와줬다. 난 켄이 영어 공부를 하다 모르는게 생기면 최선을 다해 답을 했고 공부 방법에 대해서도 내가 아는 것들을 얘기했다.


켄은 한국 라면 중독자였다. 매일 같이 라면을 먹었다. 그것도 호주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신라면이 아닌, 마트에서 파는 진라면 매운맛을 먹었다. 고급 레벨이었다. 맵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그런데도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몸에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는 켄이 주말에 자기가 다니는 헬스장에서 같이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호주의 헬스장을 구경하고픈 마음에 같이 가자고 했다가 집에서부터 뛰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헬스장에서 1시간 운동을 하고 또 뛰어서 집에 왔다. 신호등 기다릴 때 말고는 걷지도 못했다. 모진 조교 같은 켄과 스파르타식 훈련을 하면서 살이 조금 빠지긴 했다. 켄도 전보다 아는 영어 단어가 많아졌다. 물론 여전히 그는 매일 같이 진라면을 먹었다. 나중엔 밥까지 말아 먹었다.


어떤 날엔 내게 속상한 일이 있었다. 알바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예전 호스텔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에게 뭐하냐고 연락을 했더니 지금 다 같이 바에 가려고 나가려던 참이라며 오라고 했다. 나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와인 한 병을 사서 쉐어하우스 집에 왔다. 혼자 있고 싶었지만 밖에서 마땅히 술을 마실 곳이 없었다. 집에서 몇 명은 요리를 하고 있고, 몇 명은 쇼파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쉐어메이트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와인과 이어폰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의자에 앉아서 와인 병나발을 불면서 눈물을 꺽꺽 흘리고 있는데 몸이 시리게 추웠다. 시드니는 6~8월이 겨울이었고 하필 며칠간 비바람이 몰아쳐서 패딩을 입고 다녀야 하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겉옷을 가지러 방에 들어가고 싶은데 휴지를 안 갖고 나와서 룸메이트들한테 이 상태로는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보일 것 같았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와인은 마셔야겠고, 너무 춥고, 벌벌 떨고 있는데 갑자기 베란다 문이 열리더니 등에 담요가 툭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무심한 표정의 켄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인도에서 온 친구와도 조금씩 친해졌다. 그 친구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인도에서 집안이 다 의사인데 자기는 의사가 하고 싶지 않고, 그걸로 부모님과 갈등을 벌이다가 결국 호주로 대학원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생활비를 보내 주겠다고 하지만 자기 손으로 삶을 일구고 싶어서 배달 알바를 할 거라고 했다. 시드니 길거리에선 자전거를 타고 하는 우버 이츠 배달 알바들의 모습을 늘 볼 수 있는데, 특히 언어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유로 워홀러들 사이에서 배달 알바가 인기가 많았다. 힘들지만, 페이도 괜찮다고 했다. 인도 친구는 배달 알바를 하는게 두렵다고 했다. 부모님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하찮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까봐 걱정된다고도 했다. 우리는 새벽에 3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나도 이곳에 오기까지 나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우리는 각자가 올바르다고 믿는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공감했다. 며칠 뒤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배달 알바를 끝내고 돌아오는 인도 출신 친구가 자전거 헬멧을 벗으면서 씩 웃었다.


싱글맘 룸메이트는 늘 필리핀에 있는 아들과 영상 통화를 했다. 우리들 한 명 한 명을 화면으로 소개해주기도 했다. 영어를 굉장히 잘했고 아시아와 아랍을 거친 다이나믹한 인생 얘기를 하면서 코를 휑 풀곤 했다. 호주로 이민을 올 계획인 것 같았다. 우리 여자 룸메이트들은 필리핀 출신 친구가 데이트를 하러 나갈 때 입을 옷을 같이 골라주곤 했다. 도쿄에서 온 여자 룸메이트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 같이 영어학원에 다니는 일본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페루에서 온 친구는 호텔일을 하느라 바빴다.  


어떤 주말엔 인도 친구의 제안으로 다같이 동네 수영장에 갔다. Ian Thorpe Aquatic Centre라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다섯 번이나 딴 호주의 수영선수 Ian Thorpe을 기념하며 만든 실내 수영장이다. 다행히 한국에서 수영복을 챙겨왔어서 나와 필리핀 친구(편의상 출신 국가+친구를 붙여 적기로 한다), 인도 친구, 콜롬비아 친구 이렇게 넷이서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을 좋아해서 혼자서는 종종 가지만 친구들과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같이 레일 출발선에 섰고, 한명씩 반대편 레일로 몸을 움직여 나갔다. 나는 으레 혼자 하던대로 정신없이 레일을 완주하다가 문득 멈춰서 친구들이 어디있는지 확인했다. 인도 친구가 옆에 오더니 "너무 열심히 하는 것 아냐? 우리 다같이 놀자!" 하고 레일이 없이 자유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공기가 빵빵하게 채워진 공으로 넷이서 물에 몸을 반쯤 넣고 공놀이를 했다. 공놀이라니, 거의 20년 만에 하는 것 같았다. 공을 던지고, 놓치고, 공을 잡으려고 헤엄을 치고, 공을 잡으려고 뒤로 발을 뻗다가 넘어지고, 넘어지는 친구를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투명한 유리벽으로 뒤덮인 수영장 천장 위로 햇빛이 비쳤다. 햇빝 아래 수영장에서 한 시간 정도 공놀이를 하고 그 옆에서 물 마사지를 받으며 쉬다가 수영장에서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식료품점에 들려 각자 먹을 것을 사와서 졸릴만큼 배부르게 먹었다.


세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8명이 사는 쉐어하우스에서의 삶이 하루 하루 흘러갔다. 어떤 날은 집에서 카레 냄새가 났고, 어떤 날은 라면에 와인 파티를 벌였고, 어떤 날엔 인도의 전통 과자를 나눠먹고, 어떤 날엔 호주의 느린 행정 처리에 분개하며, 어떤 날은 다같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고, 어떤 날엔 고무 장갑을 끼고 집안 구석구석을 대청소하며, 빵꾸 뚫린 쓰레기 봉투에 분개하며, 렌트비를 받는 날에만 답장이 빠른 집주인에 대해 궁시렁대며, 각자의 삶을 함께 살았다. 혼자 10년을 살며 집에서 만든 추억들 만큼 많은 추억들이 고작 몇 개월 동안 8명의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차곡차곡 쌓여갔다.


좋았다. 이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물론 누군가가 코를 굴 땐 이곳이 싫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닫고 혼자 쉴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었으면 했다. 운동하고 돌아와서 샤워를 바로 하고 싶은데 기다려야 할 때, 요리하고 싶지만 부엌이 만석이라 기다려야 할 때, 일찍 자고 싶은데 거실이 소란스러워서 늦게 자게 될 때엔 당연히 혼자 살던 나만의 방이 그리웠다. 하지만 나와 다른 7명의 사람들과 공간을 나누고, 말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 하고 대화를 하며 서로 알아가는 건 결코 서울 원룸에선 만들 수 없던 시간들이었다.


당시 나는 우연한 기회로 호주 현지 회사에서 제안을 받아 풀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는 시드니 외곽에 있어서 트레인을 타면 왕복 두시간은 넘게 잡아야 하는 곳이었다. 한 달 동안은 통근을 했다. 그러다 회사에서 생소한 분야를 맡게 되며 퇴근 이후 저녁에 공부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졌다. 저녁 시간 쉐어하우스는 다들 밥을 먹거나 티비를 봤고, 우리나라처럼 늦게까지 작업할 수 있는 카페나 공간을 호주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맥도날드나 KFC가 있었지만 와이파이는 당연히 되지 않았고,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했기에 마땅한 장소가 필요했다.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이번엔 회사 근처에 있는 1인실 쉐어하우스를 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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