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호스텔이 집이 될 수는 없다면
그렇다면 집은 어떤곳일까
호스텔에서 사는 것에 좋은 점이 많고 지내는 동안 마음과 몸이 건강해졌다. 부지런히 움직였고, 좋은 일자리도 구했고,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친구를 사귀었다. 그럼에도 결국엔 쉐어하우스로 이사를 갔다. 조금 더 '집다운 집'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은 왜 집이 될 수 없었던 걸까?
집으로서 호스텔을 바라볼 때 몇 가지 단점들을 떠올릴 수 있다.
1. 호스텔의 활력과 분위기를 나의 일상이 감당하지 못 할 때가 있다.
살 장소를 결정할 때 그 동네 사람들이 대체로 어떤 일에 종사하는지도 동네의 특성이 된다. 사람들의 생활 패턴, 직업적 성향, 소득 수준 등이 동네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 쉐어하우스도 하우스메이트를 구할 때 직장인은 비슷한 생활 패턴을 가진 직장인을 선호한다. 그래야 서로를 배려하기가 좀더 쉽기 때문이다.
여행객들로 가득 채워지는 호스텔의 활력은 여행객의 입장이 아니라면 마냥 즐길 수는 없는 요소가 된다. 매일 밤 파티에 참여하고, 매일 어디론가 놀러다닐 수는 없었다. 주 5일 고정적인 일을 하게 될 경우 주말에 쉬고 싶을 때에는 그 모든 에너지와 축제와 음악과 모여있는 사람들을 감당하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나도 고정적 일자리를 구하면서, 파티가 없더라도 조금 더 조용하고 나와 일상이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이사를 결정하게 됐다.
2. 나만의 공간이 없다.
혼자 사는 삶은 적막할 때도 있지만 천국일 때도 있다. 더운 여름 바깥 외출을 하고 돌아와 시원한 에어컨을 켜놓고 쉴 때, 피곤했던 한 주를 마치고 토요일에 10시간 넘게 실컷 늦잠을 잘 때, 맛있는 음식을 시켜서 먹으며 침대에서 뒹굴뒹굴할 때. 아무의 방해도 간섭도 없이 오롯이 나 혼자 공간을 차지하는 기쁨은 천국과도 같다. 아마 이런 기쁨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혼자 사는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나도 이불 속에서 실컷 뒹굴고, 쉬고, 마음껏 게으름 피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호스텔에서 쉬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아플 때, 피곤할 때, 그럼에도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을 땐 내게 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얘기를 하겠지만 방을 여러명과 나누면서 집을 공유할 때, 방을 혼자 쓰면서 집을 공유할 때, 방이자 집을 혼자 쓸 때 각각 '나만의 공간'에 대한 느낌이 달랐다. 누구와 사는지, 어떤 건물에 사는지도 중요할 테지만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지'의 여부는 집에 대해 결정할 때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3. 누군가는 반드시 코를 곤다.
1인 가구 원룸의 장점은 나 빼고 아무도 코를 골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코를 곤다 해도 나는 대체로 못 듣기 때문에 코골이의 불편함을 겪을 이유가 없다. 호스텔의 단점은 코골이 빌런을 만날 가능성이 매일 매일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가 두 번째로 이 호스텔에 들어왔을 때 방을 공유했던 룸메이트가 밤새 코를 골아대는 통에 잠을 거의 못잤다. 어젯밤 코를 골지 않은 이도 오늘 밤에 어찌 될지는 모르고, 새로 들어온 투숙객이 코를 골지 안골지는 반반의 확률이기에 예측하기 어렵다.
4. 샤워를 하기 위해 사물함 자물쇠를 연 후 다시 닫고, 옷을 다 입고서 샤워실에서 나와야 한다
혼자 살면서 가장 편리한 점 중 하나는 집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입고 다닐 수 있는 거다. 옷을 입든 안 입든, 아무도 볼 사람이 없으니 신경쓸 것도 없다. 또 원룸 나만의 공간에는 항상 내가 원하는 자리에 나의 물건이 있으므로 문단속만 철저히 한다면 도난이나 분실의 위험을 매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호스텔에서 잠들기 전에 샤워를 하러 가려면 무려 다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1) 자물쇠로 잠가 놓은 사물함을 연다
2) 호스텔 열쇠 목걸이나 가방 등의 악세서리를 벗는다
3) 캐리어 자물쇠를 열어서 수건이나 갈아입을 옷을 꺼낸다
4) 파우치를 열어 세면 도구들을 꺼낸다
5) 슬리퍼나 조리 등 샤워 후에 젖은 발로 신기 적당한 신발로 갈아 신는다
6) 휴대폰을 포함해 짐을 다시 다 사물함에 넣고 자물쇠로 잠군다
7) 방 문을 열고 복도를 걸어 샤워실에 간다
8) 샤워를 하려고 딱 들어왔는데 폼클렌징을 안가져왔다.
9) 다시 옷가지를 들고 객실 문을 열고 사물함 자물쇠를 따서 파우치 안에 있는 폼클렌징을 챙긴다
10)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11) 샤워실 안에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속옷을 갈아 입는다
12) 속옷을 갈아입으려다 팬티가 바닥에 떨어진다
13) 팬티에 묻은 물을 툭툭 털고 실내복을 마저 입는다
14) 샤워실에서 나오며 생각해보니 양치 도구를 가져오지 않았다
15) 다시 객실에 들어가 자물쇠 사물함을 열고 샤워 용품들을 넣은 다음에 양치 도구를 꺼낸 후 사물함을 닫는다
16) 공용 화장실로 이동해 양치를 한다
매일 이 과정을 최소 두 번 반복하는 것을 2주 정도 하다 보니, 물론 나중에는 사물함 자물쇠는 커녕 문도 제대로 안 닫고 화장실로 간 적도 있었지만, 너무나 귀찮고 피곤했다! 샤워실에 샴푸를 비롯한 세면 용품들을 구비하는 '사치'는 적어도 쉐어하우스에서부터 누릴 수 있었다.
5. 환기가 약하거나 실내 공기가 탁할 수 있다 어디선가 갑자기 방구 냄새 같은 것이 날 수가 있다.
호스텔은 여러 사람들이 머물고 사람들의 이동이 많다. 보안 문제 때문에 객실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기는 구조였는데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건물 전체 환기 구조가 괜찮은지 방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혼자 원룸에서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사는 삶에 비해서는 실내 공기가 탁할 수 있다. 또 예상치 못한 냄새가 수시로 내 공간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
6. 가끔 누가 내 음식을 훔쳐가기도 한다.
공용 생활 공간인 고시원, 하숙집, 쉐어하우스에서 으레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음식 도둑'이다. 쉐어하우스는 동고동락하며 안면을 트고 신뢰관계라도 쌓을 수 있는데, 익명성이 큰 호스텔에서는 당연히 도난 사건들이 많다. 객실 방은 자물쇠로 잠글 수 있었고, 해당 객실 키가 없으면 아예 출입이 안되어서 방에서 뭔가를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용 부엌 공간의 냉장고는 잠금장치가 없었고 그저 가방에 물건을 넣은 뒤 이름표를 붙여 놓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음식을 보관했다. 음식점에서 흔히 보는 크기의 대형 냉장고가 8개 넘게 있었고 다들 쓰는 가방들이 대체로 비슷하게 생겨서(인근 마트의 장바구니) 쉽게 타겟이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근처 마트에서 산 과일과 야채, 참치 통조림 등이 담긴 내 장바구니를 몽땅 누군가가 훔쳐간 일이 있었다. CCTV로도 찾아내기 어려웠고 (장바구니가 다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발만 동동 구르는 내게 호스텔 측에서 보상금(?)이랍시고 10달러 인가를 건넨 에피소드가 있다.
7. 토요일 밤에 다른 방에 머무는 누군가가 취해서는 자꾸 문을 열려고 한다.
호스텔에서 금, 토요일과 같은 시간을 혼자 원룸에서 지낼 때보다 더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건 그만큼 불쾌한 일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어슬렁 대는 취객들이 로비에 자주 출몰했다. 프론트에 직원이 상주하면서 어느 정도 제재를 하긴 했지만 클럽이자, 식당이자, 숙소이자, 방이자, 여행객의 쉼터 역할을 하는 호스텔에서 모든 사건을 일일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새벽에 취한 다른 방 투숙객이 우리방 문을 열려고 한 적도 있었고,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이 새벽 네시쯤 들어와서 엄청나게 취한 상태로 하는 얘기들에 잠에서 깬 적도 있다. 지하에서 밤새 울리는 쿵쿵거리는 하우스 음악 소리가 다행히 5층 이상부터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 투숙객들이 좀 더 저렴한 값에 머무는 2층에서는 쿵쿵거리는 소리 뿐 아니라 그 진동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이 모든 이유와 함께, 호스텔은 '집'이라는 느낌이 덜했다. 모두의 공간이기에 나만의 공간이 아니었고, 매일 매일 한 무더기의 여행객들이 찾아오고 떠나는 공간에서 피곤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집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오롯이 나를 위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것 아닐까. 바쁘고 정신없는 현실로부터 조금 멀어져 조용하고 안락한 공간이 되어주는 것 말이다. 당장 1인실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조금 더 사람들과 함께 살아 보기로 했다. 호주까지 왔으니, 서울에서와는 다른 삶을 겪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4명이서 한 방을, 8명이서 한 집을 공유하는 '쉐어하우스'로 다음 거처를 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