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호스텔 체류기 - 과연 호스텔이 집이 될 수 있을까?
내 발 밑의 서울
호주로 가는 비행기 안, 나와 내 전재산(캐리어)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을 앞두고 있다. 날씨는 나쁘지 않다. 바람도 잔잔하고 비도 오지 않으며 파일럿 조종사가 신뢰감을 주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오늘의 여정을 안내한다. 그 순간 갑자기 쿵 하고 비행기 몸통이 흔들거렸다. 작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다 대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이 비행기가 불의의 사고를 겪게 된다면, 그래도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라고. 벨이 울리고, 안내음이 띠 띠- 나오고, 드디어 10년 만에 서울이 내 발 밑에서 점점 작아져 갔다.
밤샘 비행을 끝내고 호주에 도착했다.
새벽 5시.
공항에서 처음 마신 호주의 커피는 듣던 대로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캐리어를 끌고 예약한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집도, 직업도 없는 우리는 "워홀러"
호주는 세계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다. 한국인에 대해서도 그렇듯 대체로 신청을 하면 비자를 내준다. 또 유럽이나 캐나다 쪽에서 온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남쪽 섬나라에 대한 궁금증도 있는 것 같다. 막상 호주 정부 입장에서는 농장과 공장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한 이유가 크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살아보고 만족해하며 이민을 결심하는 이들도 굉장히 많았다. 영국과 미국 출신의 청년 중에서도 말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갖고 호주에 오는 이들은 집도, 직업도 없이 맨 몸 하나만 들고 오기 때문에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1. 최소 며칠, 길게는 2주 정도 머무를 숙소를 잡는다. 보통 호스텔을 잡는다. 호스텔은 대체로 늘 방이 있고 다인실은 가격이 합리적이다. 비슷한 처지의 여러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고, 정보도 얻으며 향후 계획을 세우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귈 수 있다.
2. 호스텔에서 머무르며 좀 더 장기로 머무를 집을 알아보고, 일을 알아본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도, 회사를 알아볼 수도 있다. 또는 농장과 공장에 가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집을 구할 땐 보통 여럿이 룸메이트가 되어 한 방을 나눠 쓰는 쉐어하우스를 구한다. 시드니 집값이 무척 비싸고 대체로 다인실 쉐어하우스 매물이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1인실 쉐어하우스도 있긴 하다)
3. 'Inspection'이라고 해서 발품을 팔며 원하는 집을 정해 이사를 한다.
4.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이상 그곳에 살며 일을 한다 / 또는 농장이나 공장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살며 일을 한다.
호주에 도착해 처음 머무른 숙소는 시드니의 중심가 중에서도 '센트럴 스테이션'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Wake Up! Sydney 라는 호스텔이다. 구글에 검색하면 리뷰가 무려 1,370개 있다. 이왕 해외로 가는 김에 다국적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나는 해외에서 많이 쓰는 예약 사이트에서 상위 랭킹에 있던 이 호스텔을 찾았다. 위치와 리뷰가 좋아서 예약했다. 확실히 호스텔에 한국인은 많이 없었고, 아시아인도 많지 않았고, 유럽이나 캐나다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았다.
아침 7시에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카운터 업무를 보는 자리에 Maria 라는 친구가 있었다. Maria는 긴 앞머리를 양쪽으로 따서 늘어뜨린 네덜란드 여성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와서 호스텔 데스크 일을 하는 중이었다. (워홀러 중에 처음 머문 호스텔에서 일을 구해 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어떤 일들을 구할 수 있는지는 다른 글에서 더 볼 수 있다) 데스크 업무를 봐주는 사람을 잘 만나면 좋은 게, 호스텔은 회전률이 높고(하루, 이틀 머무는 사람들이 허다하니까), 빈방이 수시로 생기며, 호스텔에서 일하는 사람이 객실 상태나 객실에 머무르는 손님들에 대해서도 잘 알테니 괜찮은 방을 구해줄 수가 있다. 방을 잘 만나면 4인실에서 혼자 자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Maria는 아침 7시에 도착해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선 횡설수설하는 나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깨끗하고 텅 비어 있는 4인실 방을 내줬다.
호스텔은 전체 7층까지 있었다. 지하엔 Side Bar라고 하여 술과 가벼운 안주를 파는 바가 있고 1층은 로비다. 2층은 공용 부엌 공간이 있어 요리를 하거나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거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또 장기 투숙객을 위한 10인실 방들이 있다. 3층부터 8인실, 6인실, 4인실 객실들이 있다. 꼭대기 층에는 시드니 번화가 전체 뷰를 감상할 수 있는, 아주 비싼 1인실도 있다.
호스텔에서 며칠 지내보니 생각보다 편리하고 마음에 들어서 여기서 2주를 더 머물게 되었다. 한국 오기 전에 머무른 것을 합치면 호주에서 총 한달 정도 이 호스텔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6개월 넘게 살고 있는 친구들도 여럿 만났다.
호스텔이 집이 될 수 있을까?
그동안 호스텔(또는 게스트하우스)은 내게 여행할 때 잠시 놀다 가는 곳이었다. 특히 제주도에선 바베큐 파티 등의 이벤트 때문에 여행 중 하루 이틀 정도 머룰렀다. 그러다 이 호주의 호스텔에서 6개월에서 1년 동안 장기 투숙을 하는, 그러니까 호스텔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집으로서의 호스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나또한 호스텔에서 꽤 오래 지내면서 이곳이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코로나 때문에도 그렇고, 서울 집값이 점점 높아지면서 호스텔과 같은 주거 형태를 단기 혹은 중단기 거주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세계에서 집값이 세번째로 비싼 시드니의 호스텔은 대체로 여행객, 워홀러와 이민자들로 채워지긴 했지만 이곳에서 장기 거주하는 중장년층의 현지인도 몇 명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시드니의 호스텔과 주변 친구가 머문 인근 호스텔을 바탕으로, 집으로서의 호스텔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자는 공간이 다른 공간과 분리되어 있다.
1인 주거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는 서울에서 대부분의 집들은 방 한 개 짜리 원룸 형태다.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놀고, 요리하고, 술 먹는 공간이 딱 하나 뿐이다. 그나마 세면과 배변 활동을 하는 공간이 또 하나의 방이라면 방으로 분리되어 있긴 하다. 고시원이나 하숙집의 경우엔 칸막이 같은 유리 하나로 구분이 되거나, 아예 방에 화장실이 없고 공용 화장실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쉐어하우스는 객실에는 침대만을 놓고 방에서 취사나 음식물 섭취를 금지한다. 부엌, 화장실, 세탁실이 따로 있고 거실의 역할을 하는 공간도 따로 있다. 사고가 생기거나 다른 이들에게 민폐끼칠 것을 우려해 객실에서는 음주도 금지하고 술을 마시거나 놀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다. 객실에선 대체로 잠만 잔다.
2. 사람들이 계속 움직이고 들어오고 나가고 대화를 하는 '로비'라는 공간이 있다.
서울의 원룸에서 산다면 출근 전에 마음 준비를 하거나, 퇴근하고 아무 생각없이 쉬거나, 혹은 주말 오전 같은 때에 멍 때릴 곳이 침대나 책상/식탁 밖에는 잘 없다. 대부분의 4~6평짜리 원룸에 쇼파가 들어가지 않고 쇼파가 들어간다 해도 거실의 느낌을 줄 수 있을 만큼 공간을 꾸미기가 어렵다. 하지만 쉐어하우스에는 '로비'라는 공간이 있는데 호텔 프론트처럼 체크인/체크아웃 업무를 보는 데스크 너머로 쇼파와 테이블을 갖다 놓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쉬고 앉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이 공간이 나는 처음엔 그냥 체크아웃, 체크인하기 전에 대기하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로비는 내 '본격적인 삶'(직장, 공부 등)과 '잠'이라는 완전한 휴식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버퍼 공간'이 되어줬다. 원룸에서 만약 중요하게 집에서 할일이 있다면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바로 가야 한다. 책상 앞에 너무 바로 앉으면 일하기 싫고 딴짓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특히 잠이 덜 깼을 때는 말이다. 그런데 이 로비라는 공간은 외출 전후, 밖으로 볼일을 하러 나가기 전 등 짧은 시간동안 잠깐 잠깐 휴식할 수 있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고, 멍 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누군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고 '일'이라는 사회적 관계의 세계로 나아갈 준비 시간을 준다. 또 해야할 일이 아주 조금 남은 저녁, 가벼운 백색 소음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할일을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에 책상에 앉는 것보다 부담과 스트레스가 적다. 24시간 열려 있는 카페 같은 로비는 호스텔에 들어오는 순간 그 조명과 분위기로 인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친구와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원룸에서 살 땐 전혀 알 수도, 경험할 수 없던 공용 공간이었다.
3. 침대에 누워서 오랫동안 휴대폰을 보기가 좀 그렇다
언제부턴가 자기 전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별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왠지 그냥 자기엔 아쉬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켜서 SNS를 들어가거나 한다. 어둔 방에서 눈이 아프도록 화면을 보다가 한 시간, 두 시간이 훅 가기도 한다. 자기 전 최소 2시간 동안에는 휴대폰이나 아이패드와 같은 화면을 보지 않는 것이 숙면에 좋다는 얘길 듣긴 했다. 일이 바쁘거나 잠을 잘 시간이 별로 없을 때, 잠자리에서 휴대폰을 보며 노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을 고치기가 참 어려웠다. 그런데 호스텔은 보통 여러 명이 함께 자고, 밤 10시쯤 누군가 잘 시간이 되면 방 불을 끄므로 휴대폰을 보느라 화면 불빛이 계속 나가게 하는 것이 조금 눈치 보인다. 물론 대놓고 "저기, 휴대폰 좀 꺼줄래?"라고 묻는 사람은 없지만, 그냥 말 안해도 그 기운으로 느낄 수 있다. 작은 방 안에서 휴대폰 불빛이 꽤 강하게 퍼지기에 누군가가 자꾸만 헛기침을 하거나 뒤척뒤척이면 자연스레 모두가 휴대폰을 끄고 잠에 들게 된다.
4.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기가 조금 어렵다
혼자 살면서 나는 하숙생이었고, 재수생이었고, 대학생이었고, 취준생이었고, 회사원이었고, 백수였다. 그 모든 시기 중에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는 날들도 많았다. 당장 할일이 없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아무런 약속이 없는 날들 말이다. 그런 시기에는 아침을 자면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마다 생활 패턴이 다르고 활동 시간도 달라서 누군가는 아침에, 누군가는 오후나 저녁에 활동을 시작하는 걸 선호할 수 있다. 그런데 호스텔에서 생활하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여행이든, 일이든 어떤 목적을 갖고 한정된 시간 내에 체류하기 위해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아침에 다들 할일이 있다. 새벽 같이 일어나 무슨 투어를 가는 사람들도 많고, 새벽 일찍 출근하는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도 있다. 한 명 두 명의 알람이 울리고 누군가 일어나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면 그 모든 소리들 와중에 깊은 잠에 계속 드는 것이 어렵다. 덕분에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되는 건, 호주의 황홀한 아침 커피와 함께 할 수 있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5. 하루, 이틀, 몇날 며칠 계속 집콕을 하고 있기가 조금 그렇다
4번에서도 그랬지만 늦잠을 자거나, 할일이 없는 날엔 집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집은 아늑하고 쉴 수 있고 코로나 시기에는 더 집에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해야할 일들을 미루면서 집에'만' 있게 되는 시기들이 있었다. 호스텔은 청소 시간에 방을 비워줘야 하고, 또 사람들이 대체로 어디론가 후다닥 나가버리기 때문에 방에 오래 머무는 행위가 약간 어색해진다. 그러다보니 '그래, 뭐라도 하자'라는 마음이 든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어슬렁 어슬렁 노트북을 들고 로비에라도 나가다 보면 신기하게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하게 된다. 아니면 적어도 로비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수도 있다.
6. 대체로 교통이나 이동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호스텔은 이용객들이 접근하기 편리해야 하므로 교통의 요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동네를 알아보기에도, 여기 저기 다니기에도 좋은 위치에서 지내게 된다.
호스텔에서 지내며 10년 동안 익숙했던 서울 원룸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찾아보며 앞으로 내가 어떤 주거 환경에서 살고 싶은지 고민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내가 느낀 집으로서의 호스텔의 장/단점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