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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아 Dec 30. 2021

"서울, 재미있는 지옥"

새로운 집을 찾아서 - 10년 서울 살이를 정리하던 날

편의점 서울


아마도 우리가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건 우리나라 인구의 반 이상이 서울에 살고 있기도 하고, 교육과 경제, 정치, 문화의 중요 기관이나 건물이 대체로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본격 자취 생활을 시작했고 당연히 서울에 있는 회사에 지원했다. 친구들이 대체로 다 서울에 살고 있고 지하철로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편리하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새벽 세시에 배달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지하철 짧은 거리로 한강, 공원, 백화점, 중심 거리에 다 닿을 수 있다. 어느 곳에나 편의점과, 택시와, 지하철역이 있다. 새벽에도 불을 켠 곳곳의 상점들 덕에 놀 거리들이 넘쳐난다. 저녁 6시만 되면 온 동네에 불이 꺼지는 호주 도시로 이민을 간 언니가, “서울이 재밌는 지옥이라면 호주는 심심한 천국”이라고 했다.


퇴사를 하고 나니 처음으로 서울에 살 이유가 없어졌다. 그건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어느 곳에서도 살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곳이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선택지였다. 경기도 지도를 보며 이 곳은 방이 좀더 넓을까? 궁금했고, 부산, 광주 등 낯선 도시의 삶이 궁금했다. 그러다가 문득, 꼭 한국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미 퇴사를 했고 당분간 회사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돈을 벌며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면, 내가 살 곳이 꼭 한국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보다가 떠오른 게 바로 ‘워킹홀리데이’ 제도다.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돈 벌고 살아보는 것 - 워킹홀리데이


워킹홀리데이는 나라간 협정을 맺어 만 18세에서 30세의 청년이 해외여행을 하며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다. 보통의 관광비자로는 현지에서 취업을 할 수 없는데 반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는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1년에서 2년 정도까지 그 나라에 머물면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관광도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내게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만 30세가 아직 안 된 나이였으니 요건도 맞았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비자 발급 조건은 나라마다 다른데 나이, 초기 비용 보유 유무, 신체 검사 결과 등 기본적인 조건 외에 크게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줄 아는 언어로 말이 통할 수 있는 영어권 국가에 가기로 했고 수십개의 가능한 국가 중에 후보지를 캐나다, 호주, 영국으로 정했다. 


캐나다는 제비 뽑기로 지원자를 선별하고 영국은 한 번에 2년 체류가 가능한데 역시나 추첨을 통해 선발한다. 신청 날짜와 선발 인원도 정해져 있다. 하지만 호주는 언제든 신청이 가능하고 또 선발 인원에도 제한이 없다. 나는 캐나다 워홀을 신청했고, 혹시 추첨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 호주에도 신청서를 넣었다. 호주 또는 캐나다에서 1년~2년을 살고, 그 이후엔 영국에서 2년을 체류할 작정이었다. 이왕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싶었고, 또 워킹홀리데이 제도에 나이 제한이 있으므로 가능한 나이까지 꽉 채워서 이 제도를 활용하고 싶었다. 


가자, 호주로.


캐나다 추첨에 선발되지 않아서 호주로 자연히 목적지가 정해졌다. 비자 신청서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10년 서울 살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국일을 정해 비행기를 예약하고, 부동산에 퇴실 일자를 말했다. 이곳 저곳 이동할 상황을 고려해 캐리어 딱 하나로 전재산을 추리기로 했다. 갖고 있는 짐들의 카테고리를 나누어서 의류 / 가전 / 책 / 잡화 등 팔 수 있는 것은 팔고, 줄 수 있는 것은 주고, 나머지는 버렸다. 심사숙고하며 가져갈 짐들을 정리했다. 일단 4계절을 겪을 수 있는 옷이 있어야 했다. (언젠가 갈 수도 있는) 캐나다의 심각하게 추울 겨울을 고려해 패딩과 후리스, 수면 양말을 챙겼다. 평소에 입을 것들로는 면으로 된 발팔 또는 긴팔, 후드 집업만 남겼다. 그래야 두고 두고 빨아 입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물을 머금고 아끼는 원피스, 니트 등을 처분했다. 중고 물건을 들고 기부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가게>에 몇 번을 왕복했다. 중고 서점을 왔다 갔다하며 책들을 팔고 밥솥이나 청소기와 같은 것들도 처분했다. 중고로 이북 리더기를 샀고, 신발은 편한 운동화만 남겼다. 화장품 역시나 파우치 하나에 들어갈 크기만 남기고 다 정리했다.


유목 생활을 위한 짐을 싸는 과정에서 물건들이 내게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물건들의 카테고리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과, 내가 사회적 관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옷, 돈, 휴대폰, 지갑, 여권, 가방, 운동화, 양말, 속옷, 세면도구, 자외선 차단제 등이 전자에 해당했다면 "예쁜" 옷 또는 정장, 구두, 색조 화장품이나 향수, 각종 "패션" 가방들과 신발들 등은 후자에 해당 됐다. 가지고 다닐 수는 없지만 내게 꼭 필요한 것들엔 홈트 용품(요가 매트, 아령 등)이나 책상용 스탠드 등이 있었다. 


비행기 날짜를 잡아 놓고 오전 오후엔 알바를 하고 저녁마다 오피스텔을 가득 이루던 10년치 짐들을 차례 차례 떠나 보냈다. 첫 월급으로 산 공기청정기를 팔고 온 날에는 약간 속상해서 맥주도 마셨다. 내게 정말 중요했던 물건과 작별한 날에는 이 모든 여정을 실행하는 것이 맞는지 밤새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고 혼자 하는 일이었기에 이 계획이 옳은지 그른지 누군가의 의견을 구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 게 분명했다. 미쳤다고 할 만 했다. 회사에서 나의 이력서를 읽어볼 때,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아득바득 일을 해서 월급을 모아야지 대체 무슨 무모한 짓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미친 짓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것, 그리고 이 미친 짓이 내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것. 하루 하루 짐들이 방을 나갈수록, 방은 딱딱한 벽을 바싹 드러냈다. 그리고 딱 네모 모양의 방과 캐리어 하나만 남았을 때, 드디어 한국을 떠날 날이 왔다.

 


언젠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면, <떠나려는 자를 위한 짐 준비 팁>


ㆍ 캐리어는 튼튼한 것이 좋다. 조금 돈을 주더라도 쉽게 고장 나지 않을 것으로 선택하는게 장기적으로 낫다.

ㆍ 이동이 많아질 수 있으니 가슴이나 허리춤에 찰 수 있는 가방(스트랩백 등)을 준비하면 좋다. 메는 가방보다 분실 위험도 적고 꼭 필요한 물건들 넣어다닐 수 있어서 편리하다. 

ㆍ 옷은 두고 두고 물로 빨아서 깨끗하게 입을 수 있는 면 소재를 추천!

ㆍ 하지만 아끼는 예쁜/멋진 옷들을 한 두벌 정도는 준비하기

ㆍ 비자와 여권 복사본과 여분을 꼭 챙기기

ㆍ 나의 기본적인 인적사항이나 이력서와 관련된 서류 미리 인쇄본으로 준비하기. 일자리를 구해야 하므로 언제 어느 곳에서 나를 어필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학교 졸업증명서, 이력서, 각종 자격 서류, 주민등록등본 등) 

ㆍ 면허가 있다면 운전을 하고 다닐 계획이 있든 없든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 받는 것이 좋다. 쓸모가 있을 때가 올 수도 있다! 

ㆍ 해외체류보험 꼭 들기 - 생각보다 타지에서 아플 일이 생길 수 있고 한국에 비해 다른 나라는 대체로 다 병원비가 매우 비싸다. 

ㆍ 계좌 개설 전에 쓸 수 있는 현지 통화 현금으로 준비

ㆍ 지갑은 지퍼로 완전히 다 닫히는, 튼튼한 것으로 준비

ㆍ 공식적인 자리나,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 나갈 수도 있으니 정장류의 옷 한 벌 준비하기 (신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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