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관악구 쪽에 집을 계약했다. 집은 오래된 건물로 창문이 작았지만 방 크기가 평균 원룸보다 크고 역에서 가까웠다. 더 좋은 집을 찾고 싶은 마음을 참고 이쯤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지금 내가 가진 보증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을 2주 동안 충분히 본 상태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면서 헤아려보니 이번이 7번째 이사였다. 3년 동안.3년 전 퇴사를 하고,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며 캐리어 하나를 들고 유목민처럼 이곳 저곳 떠돌았다. 지방에 원룸을 얻어 살기도 했고, 부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기도 했고, 한국을 떠나 호주의 호스텔과 쉐어하우스에서도 살았다.
유목 생활을 시작하기 전엔 방음이 잘 되는 오피스텔에서 햇빛을 쬐며 살았다. 집에서 고등어를 구워도 30분이면 비릿한 냄새가 빠질만큼 환기도 잘 됐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돈과, 회사 밖에서 살길을 찾아보겠다는 마음과, 내게 맞는 살 곳을 찾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유목 생활에서는 아늑한 오피스텔과는 차원이 다른 야생의 살 곳을 마주했다. 해가 지면 온 동네 불이 다 꺼지는 호주 동네의 쉐어하우스에선 장을 보려면 40분을 걸어야 했는데 버스를 탈 경우 53분이 걸렸다. 하우스의 얇은 벽 틈으로 밤마다 옆방 남자의 샤워소리가 들려왔다. 한적하고 아기자기한 지방의 멀쩡한 원룸에서는 툭하면 바퀴벌레가 나왔다. 부산 바다에 가까운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코를 고는 중국인 아주머니 옆 침대에서 잠에 들었다
조금 다른 삶에 대한 시도
잦은 이사와 낯설고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며 유목생활을 했던 건 딱 한 번만, 다른 방식의 삶을 시도해보고 싶어서였다. 서울 살이가 10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어느 날 퇴근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회사를 다니며 돈을 조금씩 모아 아파트를 사는 것이 나의 서울 살이의 최종 목표가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월세나 전세로 이사를 다니며 낮은 수압이나 약한 방음, 치안 문제를 겪다 보면 자연스레 좋은 동네에서 나만의 집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집값이 계속 폭등하는 이 도시에서 평생을 일을 해도 ‘아파트’를 사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말이다.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고, 회사에 가고, 아파트에서 살고, 이 모든 과정을 자식이 행할 수 있게 자식을 공부시키는 삶'으로 서울 살이를 요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맘속에선 ‘정말 이게 최선일까, 계속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멈추지 않았다.
그 의문은 두 가지 질문으로 이어졌다. 하나는, 어차피 그게 결말이라면 2-3 년 늦게 가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다른 형태의 삶을 선택할 수는 없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5-7평의 방이자 집, 출퇴근 시간 대에 얇아지는 샤워 물줄기, 계란 삶을 물이 끓기를 10분을 기다려야 하는 인덕션 레인지, 1인 가구로 살면서 일요일 저녁에 느껴지는 막막함과 퇴근하며 빈 방에 불을 켤 때 느끼는 적막함. 이렇게라도 나만의 삶이 있어서 다행이면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막막했다.
지금이 아니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작은 도시 서울에서 원룸에서 원룸으로,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이사 가는 삶에 조금 지쳐 있을 무렵, 삼 년간 몸 담았던 업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퇴사라는 어려운 결정을 하자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때는 지금이라는 자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루라도 더 젊을 때, 소속된 곳이 없이 혼자일 때 새로운 시도를 해보지 않는다면 앞으로 언제 또 이런 시기를 가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서울을 한 번 떠나 보기로 했다. 익숙한 삶의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을 모색해 보고 싶었다. 내 앞에 어떤 선택지들이 나타날지 알아보고 싶었고, 모든 가능성에 몸을 던져 보고 싶었다. 그래야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아파트를 목표로 일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해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나는 여차하면 이민을 갈 작정으로, 다양한 삶의 양식을 시도해볼 각오로, 마음에 드는 장소나 집을 찾게 되면 거기에 그냥 확 눌러 앉으려는 각오로 10년 서울 살이의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캐리어 하나, 여권, 맨 몸으로.
유목 생활의 베이스 캠프 같았던 '집'
떠도는 와중에 만난 집들은 대체로 낡고, 사람의 떼가 많이 묻어 있었고, 여러 사람과 공유되었고, 부실했다. 그때그때 가능한 일들을 구하며 자주 이사를 다녔기에 한 장소에는 몇 개월 정도씩 머물렀다. 그야 말로 유목민의 삶이었다. 잠깐 머무를 곳을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공간들은 내가 떠돌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게, 지치지 않고 원하는 장소를 찾는 시도를 할 수 있게 안식처가 되어줬다. 한편으론 다양하고 새로운 주거 형태에 눈이 트이게 되는 경험이 됐다. 서울이라는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생전 처음 가보는 낯선 장소들을 돌아다녔기에 집을 계약하는 일은 서울의 부동산 계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계약서를 쓰기도 했지만 쉐어하우스의 경우 구두 계약이 많았고 직접 이사를 하기 전에 혹시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약속된 돈을 바탕으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는 나를 위한 장소를 구할 수 있었던 건, 매일 돌아가 잠을 잘 곳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떠도는 시간 동안 그간 내 삶의 영역에서 만날 수 없던 수많은 사람과, 삶의 환경과, 모습을 마주했다. 게스트하우스와 쉐어하우스에서 여러 사람들과 공간을 공유하는 건 불편하고 번거로운 일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혼자 살며 굳어진 나의 삶의 습관들을 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나와 다른, 심지어 다른 국적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옆에서 볼 수 있었다. 도쿄 출신으로 간호사로 일하는 여자 룸메이트는 매일 저녁 다음날 먹을 도시락을 싸며 "하루에 900원이라고 해도 한달이면 큰 돈이 되니까"라고 말했다. 그에게 1주일 먹을 고기와 야채들을 작게 소분해 냉동실에 담아 놓는 법을 배웠다. 태어난 삶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한 한국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보며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어떻게 새로 정착하는지 각자의 사연을 들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며 앞으로 내가 어떤 곳에서 살고 싶은지, 정말로 한국이 아니어도 괜찮은지, 어떤 삶을 꾸리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떠올려보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하고 있다.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서울. 이사를 앞두고, 혹은 떠돌이 생활의 중간 마침표를 찍는 의미로 그동안의 여정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그동안 머물렀던 집들에 대해, 집이 될 수 있던 쉐어하우스와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생활에 대해,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의 삶과, 호주에서의 집과 삶에 대해. 왜 다시 서울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 3년의 유목이 나에게 남긴 것들에 대해서. 낡아진 운동화 밑창과 캐리어 바퀴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주고 받았던 것에 대해서. '집'이 되었던 공간들에 대해서 말이다.